
페루 안데스산맥의 소도시 우아라스에 사는 농부 사울 루치아노 리우야(44)는 따뜻해지는 날씨가 두렵다. 우아라스에서 17㎞ 상류에 빙하가 있는데, 그 아래의 팔카코차 호수의 둑이 무너져 한꺼번에 많은 물이 도시를 덮칠까 봐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3년 전 그를 화상 인터뷰했는데, 그가 스마트폰으로 산을 보여주며 말했다. “1941년에 호수 둑이 무너지면서 수천 명이 숨졌어요.”
산간 지역에 홍수가 나는 이유는 빙하 때문이다. 빙하의 말단에는 대개 호수가 있다. 호수 가장자리에는 빙퇴석으로 둑이 쌓인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빙하가 빨리 녹아 호숫물이 넘치고 둑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을 빙하홍수(GLOF·Glacial Lake Outburst Flood)라고 한다. ‘머리 위의 물폭탄’이 안데스와 히말라야 산맥의 산간 마을을 덮치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2015년, 리우야는 이 사태를 누가 책임져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독일의 최대 전력기업 RWE(아르베에)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왜 그는 독일 기업을 선택했을까? 미세먼지 같은 환경오염과 달리 기후변화는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디젤 차량이 배출한 미세먼지는 주변에만 영향을 미친다. 온실가스는 다르다. 각지에서 배출한 온실가스가 쌓여 농도가 높아지면서 전 지구 기후 시스템을 교란한다.
리우야는 자신이 직면한 빙하홍수에 대해 세계 전역에 흩어진 온실가스 배출자에게 n분의 1만큼 책임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는 한국의 기업 심지어 당신 가문이 져야 할 책임까지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리우야는 독일 환경단체 ‘저먼와치’와 함께 RWE의 온실가스 배출 책임량을 산정했다. 그리고 호수 제방을 보수하고 홍수경보 시스템을 만드는 등 예방비용의 0.47%를 부담하라고 주장했다. 금액은 2만 유로(3160만 원)이다. 고작 이 돈을 얻으려고 국제 소송까지 한다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독일 법원이 리우야의 주장을 인용하면, 기후변화 책임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의 싸움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된 이후, 세계 공동의 기후 대응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기후변화로 인한 역사적 피해와 재난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의 시각 차이였다.
화석연료로 산업화를 이룬 선진국은 ‘과거는 묻어두고 가자’고 했고, 해수면 상승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보는 태평양의 섬나라나 방글라데시 등 개도국은 ‘당신들이 일으킨 재난인 만큼 충분하게 배상하라’고 했다.
기후변화 협상이 지체되자, 비난의 화살은 선진국을 향해 쏟아졌다. 선진국은 ‘도의적 차원에서 기금을 쌓거나 지원할 수 있지만, 법적인 책임은 질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결국 세계 각국은 2023년 ‘손실과 피해 기금’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개도국이 입은 경제적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선진국의 도의적 책임과 아량에 기댄 것이었다. 한 푼이라도 급한 개도국은 법적 책임을 묻는 데 실패했다.
리우야의 소송에 각국이 주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리우야는 선진국에 책임을 법적으로 묻고 있다. RWE 측은 ‘기후변화는 특정 피해와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는 글로벌 문제’라고 주장한다. 반면, 리우야 측은 ‘0.47%만큼의 책임이 있다’고 반박한다. 소송 결과에 따라 한국 기업을 포함해 주요 기업을 상대로 한 유사 소송이 이어질 것이고 기후 외교 무대에서도 변수가 될 것이다.
소송은 10년 넘게 진행 중이다. 2015년 독일 에센 지방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2022년 함 고등지방법원이 팔카코차 호수에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지난 3월 최종 변론이 종료되어 이달 말 선고가 내려진다.
남종영 KAIST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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