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과학도 당파를 탄다"…미국 정책 입안서 드러난 좌우 차이
민주당, 과학 논문 1.8배 더 인용…싱크탱크 간 격차는 5배
2025-04-29 09:09:01 2025-04-29 14:40:29
미국 양당의 대립을 표현한 이미지. (자료=게티이미지)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미국은 지금 과학조차 정치적 스펙트럼에 따라 갈라지고 있습니다. 과학이 정책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질수록, 오히려 과학적 정보의 편향적 소비가 심화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제 과학은 중립적 진실의 수단이 아니라, 정치적 무기의 하나로 기능하는 시대가 됐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입니다.
 
과학의 활용에서도 갈라진 미국 정치
 
미국의 두 주요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은 오랫동안 경제, 안보, 사회문제 등 거의 모든 주요 쟁점에서 첨예한 대립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과학의 활용 방식에서도 두 정당 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대순 왕(Dashun Wang) 교수팀은 지난주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서 1995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 의회 위원회와 121개 싱크탱크가 작성한 24만건의 정책 문서를 분석했습니다. 이 방대한 문헌에서 42만4000여건의 과학 인용을 추출해 분석한 결과, 민주당이 주도하는 위원회와 진보 성향 싱크탱크는 공화당과 보수 진영보다 과학 연구를 훨씬 더 많이 인용하는 경향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민주당이 주도하는 의회 위원회 보고서는 공화당 위원회보다 약 1.8배 더 과학 논문을 인용했습니다. 싱크탱크의 경우 이 격차는 더욱 극명해져, 진보 성향 기관이 보수 성향 기관보다 5배 더 과학적 근거를 활용했습니다.
 
과학적 인용의 질적 차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민주당 진영은 각 과학 분야에서 동료 검토(peer-review)를 통과하고, 인용 횟수 상위 5% 이내에 드는 '영향력 있는 연구'를 인용할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반면 공화당과 보수 진영 싱크탱크는 과학 인용 빈도뿐만 아니라 인용된 연구의 영향력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25년 동안 과학 인용 증가했지만, '공통 기반'은 사라져
 
왕 교수팀의 분석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미국 정책 문서에서 과학 인용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대규모 데이터셋을 분석한 결과, 정책 문서에서 인용된 과학 논문 수는 25년 동안 꾸준히 증가해 1995년 20%에서 2020년 말에는 35%를 초과했습니다. 이 논문들은 23개 과학 분야와 17개 이슈 영역을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이는 팬데믹, 기후변화, 인공지능(AI) 등 과학적 해결이 필요한 사회 문제들이 증가하면서 과학의 정책 영향력이 높아진 결과로 풀이됩니다.
 
그런데 두 당이 참고하는 과학의 종류는 점점 더 달라졌습니다. 연구진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인용한 과학적 근거의 자연스러운 중복률을 12%로 추정하는 통계적 테스트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문서 검토 결과 중복률은 약 5%에 불과했으며, 이는 예상치의 절반 미만이었습니다. 이 낮은 중복률은 공화당과 민주당 정책 입안자들이 결정에 참고하는 정보가 주로 서로 다른 부분에 의존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기 위해, 연구진은 딥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해 인용된 과학 논문들을 주제별로 군집화(clustering)하고, 이를 다차원 공간상에 시각화했습니다. 그 결과 민주당과 공화당은 동일한 이슈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과학적 출처를 인용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예컨대, 최저임금 인상 문제를 다룬 좌파 성향의 어번연구소(Urban Institute)와 우파 성향의 고용정책연구소(Employment Policies Institute)는 최저임금 인상 효과에 대한 문서를 작성했으며, 제목이 거의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두 싱크탱크가 인용한 62개의 과학 논문 중 단 한 개만 중복된 것이었습니다.
 
과학도 ‘선택적으로’ 인용된다
 
“과학은 정책 입안자들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를 제공하지만, 정치적 성향에 따라 활용되는 과학적 증거의 종류가 선택적으로 달라진다”라고 이 연구의 공동저자인 알렉산더 퍼너스(Alexander Furnas) 박사는 분석합니다. 과학적 중립성(scientific neutrality)이 정치 과정에서는 쉽게 희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눈먼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지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상황과도 유사합니다. 과학적 단편화(scientific fragmentation)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 극단화가 심화되면서 정책 입안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강화해줄 수 있는 과학’만을 인용하는 확증편향(confirmatory bias) 현상도 함께 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과 정치, 가까워졌지만 균열도 깊어져
 
왕 교수는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밀접해졌지만, 과학의 선택적 활용은 민주적 의사결정의 질을 떨어뜨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팬데믹, AI 윤리, 기후 변화 등 긴급하고 복잡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초당적 과학적 근거 공유가 필수적인데,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카고 일리노이대 E.J. 파간 교수도 “공화당이 과학을 덜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과학적 근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양 진영이 서로 다른 과학적 정보를 통해 세계를 해석할 경우, 합리적 토론과 사회적 합의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과학에 의존하는 정도가 역대 최고 수준에 달하지만, 공화당과 민주당이 인용하는 연구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정치와 과학에도 던져주는 정책적 함의가 큽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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