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만난 초여름은 몹시 더웠다. 수용자로 만원인 서울동부구치소였다. 전 정권 대비 수용자가 1만명 이상 늘면서 과밀 수용 문제가 심각했다. 벌써 7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취재를 위해 1주일 동안 임명된 임시 교도관이었다.
그는 자신이 싼 똥을 온몸에 바르는 자해행위를 했다. 진정실의 낮은 천장 에어컨을 부셨고, 스티로폼이 들어간 벽지를 물어뜯었다. 소지(사동 도우미)들이 화장실 호스를 연결에 그를 씻겼다. 영치금도 없고 찾아올 가족도 없는 ‘법자’라 방에서 따돌림당할 게 뻔하기에 사고를 쳐 독거실에 가려고 하는 거라고 교도관은 말했다. 법자는 ‘법무부 자식’의 줄임말로 속칭 ‘개털’인 수용자를 일컫는 은어다.
3대째 정신병력이 있다는 그는 심한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20대 때부터 짧으면 4개월, 길면 8개월씩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엄마가 걸핏하면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며 열댓 번도 넘는다고 했다. 가족도 그를 버린 듯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구치소를 드나들었다. 전과 4범. 공용물건 손상, 절도, 현주건조물 방화, 폭력 등이 그가 저지른 범죄들이었다. 슈퍼 불 지르고 2년 살고 나갔다 8개월 만에 들어와 6개월 살고 나가서 보름 만에 또 들어온 거라고 남 일처럼 말했다. 그해 5월14일 출소했던 그는, 술 취해 화분을 깨고 현관문을 발로 차 찌그러뜨려 5만원 상당의 손해를 끼친 죄(재물손괴죄)로 2주 만에 다시 구속됐다. 그는 악하기보다 약했다.
“눈 뜨면 정신병원이었고 눈 떠보니 감옥”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한 생에서 그를 받아준 곳은 정신병원과 구치소밖에 없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구치소라 아니라 병원인 듯싶었다. 그를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그를 가두는데 드는 돈이 적기 때문인가.
그를 비롯해 1주일 동안 구치소에서 만난 대다수 수용자는 이른바 '잡범들'이었다. 북부지방법원에서 법정구속된 피고인들도 대개 비슷했다. 가난한 이들이 많은 지역 특성상 법정구속이 많았다. 대부분 절도, 업무방해, 재물손괴 등이었다. 직업은 무직이거나 건설 일용노동자, 노가다였다. 재판에 아예 안 나와서 구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법에 무지하기도 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니까 못 오는 거라던 교도관의 말이 기억난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석방을 보면서, 잊고 지내던 그가 떠올랐다. 법기술자들이 약자를 보호하려고 만든 인권 개념을 최고 권력자를 비호하는데 써 먹었다. 그들이 말한 무죄 추정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사법 대원칙은, 내 또래의 그와 잡범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검찰은 기계적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고민없이 영장을 내줘왔다. 건국 이래 구치소가 만원이 아닌 적은 없었다. 수백조원 손해를 끼친 내란사범 윤석열은 풀려나고, 5만원의 해를 끼친 법자는 갇히는 사회에서 정의의 여신 디케는 오늘도 말이 없다.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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