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이종용·문성주·유영진 기자) 지난 4일 오후 3시 마닐라 마카티 지역의 아얄라 거리. 특별취재팀은 마카티의 고층 빌딩 전경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은 후 보니파시오로 이동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카티에서 보니파시오의 직선 거리는 2.5㎞로 출퇴근 시간이 아니었던 만큼 택시로 이동할 시간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30분 안에는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차량호출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에 뜨는 택시 이동 예상 시간은 50분이었고, 택시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걸음 소요 시간으로는 50분이라고 뜨는데 차라리 걷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필리핀 마닐라의 마카티는 고층 건물이 줄줄이 들어선 것에 비해 도로가 좁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 오후부터 시내 도로는 붐비기 시작했다. 사진은 마카티 '아얄라 거리'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성장 속도 비해 인프라 부족
출퇴근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 차량은 오후 3시가 넘으면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필리핀은 교통 체증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인구에 비해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탓입니다. 메트로 마닐라(마닐라광역시) 면적은 서울과 유사하지만 경전철은 3개 노선뿐입니다. 총 노선 길이가 서울 지하철의 20분의 1인 약 50㎞에 불과합니다. 인프라가 부족한 필리핀의 현실을 보여주는데요. 역으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개발 수요가 많다는 방증입니다.
필리핀은 코로나19 이후 매년 5~7%대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IMF가 예상하는 2025년 성장률도 6%로 최근 3년간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서도 7%대 성장률이 흔치 않습니다. 필리핀은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도로·항공·항만 등 인프라가 덜 발달해 있어 각국 공적개발원조(ODA) 기관은 인프라 사업을 수주하기 위한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ODA는 인도주의적인 취지를 기초로 하지만 이면에는 자국 이익을 위한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어느 국가의 ODA 기관이 사업을 따내느냐에 따라 관련 기술 수출이나 기업 진출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필리핀도 지난해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완료하면서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무역과 투자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기대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일본 등 각국 공적개발원조(ODA) 기관이 인프라 사업을 수주하기 위한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필리핀과 일본 정부가 합작으로 설립한 마카티 진입 도로. (사진=뉴스토마토)
마닐라 금융 중심지인 마카티에비뉴에 위치한 수출입은행 마닐라 사무소도 필리핀에서 각종 인프라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선진국과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은은 유상원조 사업을 발굴하고 추진하는 등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서정원 수출입은행 마닐라 사무소장은 "2010년대 초반에는 중동 인프라 건설 수주가 엄청 많았다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로 많이 넘어왔는데, 그 기류가 지금 필리핀으로 연결되고 있다"며 "그만큼 한국 기업들의 기회도 커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민관 협력으로 '원팀'을 꾸려 대응하고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난 6일 필리핀을 방문해 중앙은행(BSP), 아시아개발은행(ADB)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금융위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 금융분야 발전을 위한 협력 강화, 코라나19 이후 금융정책 현황과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금융위 관계자는 "필리핀 당국과의 협력관계를 보다 강화해 우리 금융사의 해외 진출, 영업에 보다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자는 공감대를 공유했다"고 전했습니다.
"장밋빛 전망은 금물"
그렇다면 인프라금융에서 한국이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필리핀 정부는 인프라 개발 사업을 주로 PPP(Public Private Partnerships)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PPP는 민간기업 투자로 정부가 함께 개발 사업을 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민간자본 유치 사업입니다.
하지만 민간 은행들이 진입하기에는 금리 경쟁력이 여의치 않습니다. 일례로 국내 은행이 필리핀 인프라금융에 참여해 대출을 일으키고 완공 이후 상환하는 구조를 만든다고 했을 때, 미국채 금리에 연동이 되는 준거금리에 스프레드를 붙여서 8~9%정도 대출이자를 받아야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에 진출한 다른 유수의 외국계 은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와 달리 금산분리가 돼 있지 않다. 계열 은행들이 저리의 금리를 앞세워 외국계 은행과 경쟁하고 있다. 사진은 필리핀 최대 상업은행인 DBO 건물 외벽에 대출 광고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반면 필리핀 현지 대형 은행인 BDO의 경우 같은 구조로 5~6%의 대출 이자를 책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금리 면에서는 현지 은행에 맞서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 배경으로는 필리핀은 금산 분리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스페인 지배 시절부터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부동산 개발, 유통 등 재벌그룹이 은행을 소유하고 있는데요. 출처가 확안되지 않은 자본이 은행을 뒷받침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ODA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 상황도 금융 개혁을 더디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한 한국 주재원은 "필리핀은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길어 자본주의 시스템은 예전부터 받아들인 상태"라면서도 "소프트웨어는 시스템을 못 따라가는 한계점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다른 주재원은 "우리나라로서는 아픈 기억이지만 IMF사태를 계기로 글로벌 기준에 맞춰 투명성을 높이고 금산 분리를 하지 않았냐"며 "필리핀도 금융을 쥐고 있는 족벌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해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3)편에서 계속>
필리핀 세부=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문성주 기자 moonsj7092@etomato.com
유영진 기자 ryuyoungjin1532@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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