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2월 3일 밤에 발생한 계엄 소동 이후 각지에서 거리를 달구고 있는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는 드디어 대학가로 번졌다. 서울의 유명 대학 교정은 탄핵을 반대하는 보수파와 찬성하는 진보파가 세 대결을 벌이는 정치 광장이 되었다. 오랜만에 현실 정치와 관련된 대학가의 동정이 뉴스에 등장했다. 직접 보지는 못하고 언론 보도로만 현장 상황을 접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엇이 빠진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양쪽이 모두 재학생은 소수이고 외부인이 더 많아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인상을 금할 수 없었다.
1960년의 사일구 학생혁명 이후 대학가의 동정은 현실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3년에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고비마다 학생운동의 이의제기는 그치지 않았다.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1969년의 삼선개헌, 1971년의 대학생 군사훈련 전면 확대가 유발한 학생운동은 군을 동원한 계엄령, 위수령으로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로 헌정이 정지되고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2년 10월부터 1987년 6월의 시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사실상 민주화 운동의 주력은 학생운동이었다. 당연히 대학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탄압도 극심했다. 치열한 정치 투쟁의 장이었던 대학은 제도적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조용해졌다. 정당, 노동운동, 사회운동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구태여 학생들이 민주, 민중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련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북한의 실상은 교조적 좌파의 입지를 없앴다.
그러나 1997년 연말에 발생한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에 정착한 시장 원리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는 대학도 바꾸어놓았다. 교수는 논문 실적과 연구비 획득 경쟁, 학생들은 스펙 경쟁에 몰두했다. 총장, 학장은 교육부 평가 점수에 사활을 걸게 되었다. 이념 논쟁이 사라진 대학은 각자가 알아서 살 길을 찾는 생존경쟁의 장이 되었다. 실력보다 명문대 브랜드를 중시하는 세태는 거대한 사교육 시장을 창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가 17년째 대학 등록금 동결 기조를 이어가는 배경에도 내실보다 브랜드를 기준으로 대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탄핵 반대파도 스카이를 비롯한 명문대 브랜드를 활용하면 민주시민의 기를 죽일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을 한 것이 틀림없다.
대학 교정에서 벌어지는 탄핵 찬반을 둘러싼 세 대결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와 대학의 정신적 공동화를 반영하고 있다. 대학이 현실에 참여하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작년 12월 이후 정치적 난국을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판단을 제시한 교수는 있다. 과문이지만 아직 대학 내부에서 계엄과 탄핵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고 분석하며 판단을 제시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는 별로 없다. 폭도 수준인 탄핵 반대파를 경비원과 경찰이 막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할 수준으로 대학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대학의 권위는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수준에서 나온다. 어차피 새로 들어설 정부에서 대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지려면 지금부터라도 대학 개혁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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