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인간본성은 어떻게 정치양극화를 낳았나
2025-02-24 06:00:00 2025-02-24 06:00:00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는 정치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은 지 오래되었다. 이전에는 경제적 양극화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그것이 해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치양극화는 공동체의 결속을 위협하며 국민을 심리적 내전상태로 몰고 있다. 이글을 쓰려니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자기는 아침에 동네도서관에 가서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읽는데 두 신문을 읽으면 자기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고 한다. 친구들과 잡담 중 우연히 나온 정치이야기로 우정에 금가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무엇이 보통사람들을 이렇게까지 분열시켰을까? 공감본성의 편향, 대중매체 편향, 정치지도자 선동이 정치양극화를 가져왔다고 보여진다.
 
인간을 사회적으로 결속시키는 것은 공동체에서 타인과 공감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공감은 편향적이다. 즉 내편(내집단)을 향해서는 공감이 발휘되어 이타적이고 관용적이지만 남의 편(외집단)에게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이다. 이러한 집단 간 공감편향성은 인간이 원시시대부터 부족전쟁을 하면서 진화한 본성이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공감하고 타인을 위해 자기 희생하는 구성원이 많은 부족이 그렇지 못한 부족을 정복하고 그들을 대체하면서 진화에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부족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내부적으로 공감을 촉진시켜 결속하고 동시에 경쟁부족에게는 적개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래서 내편에 대한 공감(관용)과 남의 편에 대한 반감(적개심)이 본성으로 진화하였다. 인간의 공감 편향성은 인간조상이 700만년 전 침팬지에서 분리되기 전에 자리 잡았던 본성이다. 그래서 집단 간 공감 편향성은 침팬지에게도 발견된다. 침팬지는 같은 영역에 사는 침팬지들끼리 서로 협력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컷 침팬지를 살해한다. 침팬지에게는 근접성(서로 가까이 있음)이 공감 편향성을 촉진하지만 인간은 근접성에 더해 유사성도 공감 편향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같은 피부색, 종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형제애를 발휘하지만 반대되는 집단을 혐오하고 적대시한다. 공감 편향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과 견해나 배경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교류할 때 마음이 편하다. 상호 공감이 인간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유유상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공감 편향성은 잠재되어 있다가 정치지도자 선동에 의해 발현되고 대중매체의 편향에 의해 증폭된다.
 
잠재되었던 공감 편향성은 사회적 조건이 맞으면 내전으로 번진다. 16세기에 프랑스 신구교간 내전은 종교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선동으로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교리가 다르다고 신교와 구교로 편을 갈라 상대 집단을 몰살시키려했다. 이 내전을 지켜본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는 이웃사랑을 핵심 가르침으로 하는 기독교에서 적에 대한 증오심은 압도적이라고 말한다. “적에 대한 증오심에서 기독교도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 신앙에 대한 열정이 우리를 증오심, 적개심, 야심, 탐욕, 중상모략, 반역으로 기울이게 할 때, 놀랄만한 일을 성취한다.” 몽테뉴는 36년간 지속된 참혹한 내란을 30대 초반부터 지켜보았다. “내전이 횡행하여 믿기 어려운 잔혹한 악덕의 실상들이 휩쓸고 있는 계절에 살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겪고 있는 잔혹함은 고대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내 눈으로 직접 볼 때까지 단지 살인의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 종교내전은 유럽으로 번져 30년 동안 신구교 국가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현대사회에서 신문, 라디오, TV와 같은 대중매체의 발전은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주면서도 사회를 결속시켰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인간을 속박하고 불평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대중매체들이 독재국가에서 편향된 메시지 전파하는 선전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이것이 덜하지만 그래도 상업적 이유로 매체 편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SNS매체는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SNS는 노골적으로 진보나 보수로 편을 갈라 자기진영에 호소하는 메시지로 이익을 챙긴다. SNS는 정치적 견해가 비슷한 사람끼리 결속시켜주는 유유상종을 증폭시키는 매체이다. 80년대 이래 오랫동안 연구한 사회심리학 주제에 집단양극화가 있다. 이는 정치나 사회적 이슈에서 서로 견해가 다른 두 집단이 있을 때, 서로 모여서 의견을 표출하면 개인적으로 의견을 표출할 때보다 의견이 더 극단화된다는 것이다. SNS에서 메시지와 함께 댓글을 읽어가며 공감하면 자신의 견해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또한 사회심리학에서는 사회 정치적 이슈에서 극단적 견해를 갖는 사람도 외집단 사람들과 일정기간 같이 지내면 극단적 견해가 완화된다는 여러 실험결과들이 있다. 결국 자신의 견해를 상대진영의 관점에서 보아 객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서로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심화된다. 결국 유유상종을 증폭시키는 매체편향이 타 집단의 견해를 배척하는 확증편향을 이끈다.
 
공감편향이 매체편향에 의해 증폭되더라도 애초에 정치가의 선동이 없다면 정치양극화는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유권자 표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국민을 내편과 남의 편으로 갈라치기 하는 것이다. 나치가 독일인을 아리야인(내집단)과 유대인(외집단)으로 나누어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활용하여 정권을 잡았다. 마케팅에서는 차별화해야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법칙이 있다. 정치지도자가 차별화해야 할 것은 비전과 정책이지 국민을 편가르는 게 아니다. 국민은 차별화 대상이 아니라 통합의 대상이다. 마케팅과 정치는 달라야한다. 정치가는 비전이나 이 비전을 구체화하는 정책들로 표를 얻어야한다. 윤석열 정권은 취임 초 공정과 상식을 비전으로 내세웠지만 이를 구체화한 정책이 없었다. 그래서 집권 후에 자신들의 비전이 어떻게 달성되고 있는지를 국민들에게 반복적으로 홍보하기보다 여당임에도 야당에 대한 공격으로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원래 토론에서도 메시지로 상대를 이길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는 법이다. 그래서 실체도 없는 반국가세력을 계속 언급했는데 이것이 계엄선포로 야당 정치인임이 드러났다. 국가를 이끌 비전과 이를 구체화하는 정책들을 제시 못하는 무능한 지도자가 집권하면 선동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교훈이다. 정치지도자가 선동에만 의존하면 진영 내 감정전염으로 진영의 지도자에 대한 상호혐오는 증폭된다. 공감의 한 속성인 감정전염이 정치양극화의 주요 원인이다.
 
몽테뉴는 카톨릭 신자이면서 많은 신교의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신교지도자로 프랑스 왕에 올라 종교자유를 선언한 앙리4세이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저자 칼 만하임에 따르면 몽테뉴야 말로 “진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식인(free floating intellectual)”이다. 참된 지식인은 전문지식이 많거나 학력 높은 사람이 아니라 몽테뉴와 같은 열린 공감의 소유자이다. 진영에 갇힌 독단적 지식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 지성의 역사를 상기하며 정치양극화 시대에 몽테뉴의 말을 되새겨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도 이해 못하는, 남에게 빌려온, 의견 때문에 자신들이 불태워지는 것을 감내하나."
 
김근배 숭실대 명예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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