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유미 기자]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논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의 중복상장 관련 발언이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정 이사장은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며 중복상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의견을 밝혔는데요. 시장에서는 지배구조 불투명성, 주주 가치 희석, 기업가치 왜곡 등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정 이사장은 하루 전에 열린 한국거래소의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중복 상장 문제와 관련해 기업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존중해야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회복될 수 있다고 발언해 뒷말이 나왔습니다.
그간 업계에서는 중복상장 문제를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했습니다. 알짜 사업부의 분리 상장은 결국 지주회사의 수익을 중복 산정하게 만들어 모기업 주식가치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상장한
엘지씨엔에스(064400)를 비롯해 상장을 앞두고 있는 DN솔루션즈, LS그룹 계열사들 역시 중복상장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난해 11월 IBK투자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 증시의 중복상장 비율을 약 18%로 집계했습니다. 이는 △일본(4.38%) △대만(3.18%) △미국(0.35%) 등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입니다. 해외 시장에서 주주가치를 보호하고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논의가 중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김종영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스탠다드는 상장사가 중복상장을 제거해 주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국내 중복상장 비율은 비정상적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중복상장으로 인한) 이익 더블카운팅은 기업가치 평가의 왜곡, 시장 신뢰 저하, 자본 배분 비효율성을 초래해 한국 자본시장의 장기적 성장과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익의 중복 반영 문제를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중복상장 이슈는 꾸준히 지적되고 있는 문제인데 시장과 동떨어진 정 이사장의 발언이 나온 것입니다. 정 이사장은 이날 중복상장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기업의 전략적 성장, 투자를 위한 의사결정은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며 "투자자 보호에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지 보고 큰 문제가 없다면 개별 기업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은 존중되는 것이 한국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중복상장 제도를 보완했고, 최근 이에 대한 큰 시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다만 우리나라가 상장기업이나 주식 수가 미국 대비 7배 정도 많고, 주가 상승 여력이 일정 부분 제한돼있는 것 에 대한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직접적인 투자자 피해가 없다면, 중복상장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입니다. 앞서 지난해 정 이사장은 "중복 상장, 쪼개기 상장을 통해 언더라인 에셋이나 수익은 동일한데 이에 따라 발행되는 주식 수가 증가하면 밸류를 다운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엔 중복상장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지만, 이번엔 한층 완화된 인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특히 이날은 코리아디스 카운트를 해소하고 선진 자본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프리미엄 전략'을 발표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 교수는 "중복상장 자체로 투자자 이해상충이 될 수밖에 없다"며 "중복상장률이 높아서 소액주주 보호가 되지 않고, 상법 개정도 진행하는 등 문제점이 계속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인식을 보여줬다는 점은 놀랍다"고 지적했습니다. 서 교수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이 별개로 간다고 보는 관점 역시 주주 충실 의무를 담은 상법 개정의 취지와 맞지 않다"며 "향후 국내 제도 개선이 요원할 것 같다"고 비판했습니다.
국내외 달리 해외 선진시장에서는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물적분할보다 인적분할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미국 델은 자회사 VM웨어 상장 후 주주들에게 1주당 0.44주의 자회사 주식을 지급, 모회사의 지분가치 희석 논란을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존슨앤존슨 역시 2023년 켄뷰를 분사할 때 주주들에게 7% 할인된 가격에 자회사 주식 매입 기회를 제공해 주주 가치를 보호했습니다.
일본 도쿄거래소는 유가증권 상장규정 제601조를 통해 "주주 권리가 부당하게 제한될 경우 상장폐지 대상이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복상장 방지를 위해 기업에 구체적 공시 의무를 부과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상장 유지가 어렵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미국 같은 경우 중복상장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지만 중복상장이 발생했을 때 주주들에 대해 발생하는 피해에 있어서 민사소송으로 이어져 함부로 중복상장 시도를 하지 못한다"며 "현재 중복상장은 개별기업의 선택사항이지만, 일반적으로 모회사 주주들의 이익 침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지난 11일 '코리아 프리미엄을 향한 거래소 핵심전략'을 발표하고있다. (사진=한국거래소)
신유미 기자 yumix@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