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20일(현지 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사령관 무도회'(Commander in Chief Ball)에서 춤추고 있다. (사진=뉴시스)
"트럼프는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그 시대의 가식을 벗겨내는 인물일 수 있다. 본인이 그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미·중 수교를 이끌어내면서 '20세기 외교의 역사'로 불리는 고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트럼프 1기 시절인 2018년 여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흔든 '트럼프'
여기서 '역사상 한 시대'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 국제 세계질서'를 말한다. 트럼프가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상징하는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로 이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그간 미국이 자임해온 세계 경찰 역할을 거부했고, 미국이 힘을 잃은 제조업 분야에서 강력한 보호주의와 고관세를 무기로 쓰면서 자유무역체제를 허물었으며, 2021년 1월 6일 의사당 폭동 사건이 상징하듯 2020년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정권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도 이 '자유주의 국제 세계질서'의 한쪽을 차지하고 성장해 왔다는 점에서, 그 영향을 피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난 20일(현지시간)에 두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1기 때보다 더 강해지고, 더 교묘해졌다.
취임사에서 그는 불법이민 문제와 관련 "미국 남쪽(멕시코) 국경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했고, '소수자·다양성 포용 정책‘폐기를 선언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역행하는 석유·가스 시추 확대와 대외수입청(ERS) 신설 계획도 밝혔다.
취임 전부터 덴마크령 그린란드 미국 편입, 파나마 운하 재복속, 멕시코만 명칭 미국만으로 변경 등을 주장한 그는 취임사에서는 그린란드 편입만 뺐을 뿐, 영토를 확장하겠다고 천명했다. 서부 개척 역사 등을 상기하면서 미국의 영토 확장은 신이 부여한 운명이라는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명백한 운명) 표현까지 썼다.
전임자인 조 바이든은 트럼프가 취임사를 읽는 31분 내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고, 해리스 전 부통령도 불만스러운 얼굴을 손으로 가리면서 계속 옆 사람과 대화했다.
취임식 직후 트럼프는 40개가 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전임 바이든 정부가 내린 행정명령 및 조치 78건을 철회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재탈퇴했고, 쿠바 테러지원국 해제도 취소했으며, 출생 시민권 제한, 인종 간 평등 증진, 성차별 방지, 기후변화 대응,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는 이스라엘 정착민 제재 등도 뒤집었다. 또 2021년 1·6 의회 폭동 사태 관계자 1천500여 명을 사면하고 14명을 감형했다. 기존 무역협정에 대한 재검토와 전기차 관련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자금 지출에 대한 즉각 중단도 지시했다.
멕시코·캐나다 25% 이어 중국 10% 관세 예고
또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의 무역협정 체결국인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 데 이어 중국에 대해 2월1일부터 10% 관세를 예고했고 유럽연합에도 무역적자를 이유로 관세부과를 시사했다. 관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한 관세맨'(tariff man)이 사실상 글로벌 관세전쟁을 예고한 셈이다.
쇼의 달인답게 이 무더기 행정명령을 워싱턴DC의 실내 경기장 캐피털원 아레나에 모인 2만여명 지지자 앞에서 서명하는 이벤트로 만들면서 "바이든이 이렇게 하는 걸 상상할 수 있느냐" 며 자신이 서명에 쓴 펜을 지지자들에게 던지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다.
내용은 물론 형식에서도 가히 ‘트럼프 스톰’이라 할만하다. 한국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라는 리더십 붕괴 상황이라 불안감과 위기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트럼프 뜻대로 될 수는 없다. 이미 출생 시민권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에 대한 법적 소송이 제기됐다. 민주당이 주 정부를 장악한 18개주와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등의 법무장관들이 트럼프의 출생 시민권 제한 행정 명령은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20일(현지 시간)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반트럼프 시위 참가자가 트럼프 대통령 인형에 불을 붙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고관세 장기간 가능?…한국만큼 제조업 발달한 나라 드물어
국제 현안으로 등장한 고관세를 장기간 시행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에서 미국 거시 경제가 괜찮았는데도 해리스가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 중의 하나가 막판 고물가 때문이었다.
트럼프의 제조업 부활 선언은 한국에는 청신호다. 한국만큼 제조업 전반이 고르게 발달한 나라는 많지 않다. 대만은 반도체만 특화돼 있을 뿐이다. 미국의 조제업 부활에 한국은 빼놓기 어려운 파트너라는 얘기다. 트럼프가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해 한국 조선업계와 협력을 바란다고 수차례 얘기한 것도 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한국은 2023년 기준 미국 내 외국인투자국 1위(215억달러)이고, 이에 따른 일자리 창출에서도 1위다. 트럼프 정부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만한 다양한 카드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북한을 핵보유국(nuclera power)이라 부른 것은 의미가 크지만, 미국과 북한이 단기간 내 어떤 합의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북한은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회복하면서 뒷배를 든든히 한 상황이고, 트럼프 임기는 4년으로 정해져 있다. 핵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요인이 약해진 것이다. 접촉은 가능하겠으나 성과가 나올지는 불투명하다. 또 '남북은 두 국가 관계'라는 태도를 확고히 하면서 남에 대한 관심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약해졌다. 복잡미묘한 상황이지만, 한국에는 아직 시간이 있는 셈이다.
중요한 건 트럼프가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우리 자신이다. 현재의 탄핵 국면을 신속하게 정리하고 리더십을 새로 세워야 한다. '2017년 탄핵' 국면을 극복한 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더 높아졌다. 군사 쿠데타였다는 점에서 그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지만,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위기 상황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평화적으로 민주 헌정질서를 회복해낸다면 그 의미 역시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이는 전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로서 한국의 국제적 발언권과 협상력도 더 커진다는 의미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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