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일수록 사랑스러운 나란 존재',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 포스터의 문구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환장한 관심종자 시그네. 모든 관종이 그렇듯이 그녀의 삶도 온통 거짓말로 점철돼 있는데, 그녀의 증세는 조금 더 심각하여 과감한 자해로 관심을 유도하기에 이른다. 상태가 나빠져 얼굴이 더 일그러질수록 그녀의 만족도는 커진다. 주변인의 관심을 넘어 대중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터뷰에 모델제의까지 받은 그녀는 드디어 잘 나가는 남자친구 토마스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고 그와 친구들에게 자신의 잘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하필 모델로 첫 발을 떼던 날 촬영현장에서 쓰러지다니. 하늘은 유독 그녀에게만 잔인한 걸까?
시그네는 언제나 허기에 차 있다. 정신적 허기 말이다. 설치예술가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기 바쁜 토마스는 시그네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지 않는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사랑은 부모로부터도 충분치 못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는 보지 못했고, 어머니는 자신의 불안증만으로도 벅찬 사람이었다. 다행히 친구들은 많았는데 시그네가 속내를 터놓는 친구는 없었다. 그녀가 계속 자신을 포장하고 허세를 부렸던 것은 그래야만 누구라도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진정한 관계를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혹자는 그녀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가진 장점이 많은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자신의 장점을 모르면 자꾸 상대의 떡만 커 보인다. 주지의 사실이듯 이것은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탓은 부모이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탓을 부모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성인이 된 이후 특히 부모로부터 독립한 이후로는 내 인격의 절반은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자라 온 환경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반(半)환자’로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SNS이다. 자신을 어필할 줄 아는 것은 현대인의 필수자질이라지만 과시욕, 모방심리, 비교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인정욕구 증가 등 SNS의 부작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자기부정, 자기기만을 야기하고 악화한다는 점이다.
“사기의 첫 걸음은 내 거짓말에 나부터 속는 거야.”
어느 영화의 이 대사처럼 이제 사람들은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부터 속이는 짓들을 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속이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속고 속이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최근 개봉한 <그녀가 죽었다>의 김세휘 감독은 이 현상을 ‘관음’과 ‘관종’의 조합으로 해석하고 있다. 훔쳐보기를 즐기는 정태와 보여주기를 즐기는 소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소모적인 논쟁처럼 관음과 관종의 순서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질문의 가치는 이 시대에 진정 유효하다. 관음과 관종이 반드시 범죄로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작금의 그 둘은 명백한 병적 수준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SNS를 멈추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사의 위기」에서 한병철이 정보가 이야기를 차단하며 “포노 사피엔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뒤에 버려둔 채 앞으로 나아간다.”고 진단했지만 그렇다고 시대적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우리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SNS를 없애지 못한다면 그것을 하는 우리를 바꾸는 수밖에. 어쩔 수 없는 위선, 가짜인 나를 만든다 해도 최소한 진짜와 가짜는 구별해야 한다. 그래야 장례식장에서 관을 옆에 두고 셀카를 찍는 사람, 거기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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