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꺼낸 ‘동료시민’이 논쟁이 되고 있다. 진정한 동료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수직적인 당정관계가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보통 동료시민은 신민, 국민, 인민, 폭민과도 조금은 다르다. 동료시민은 수평적인 동료의식을 갖고 자치와 연대로 서로를 돕는 시민을 말한다. 정치학자들은 동료시민의 어원을 ‘공화주의’(republicanism)에서 찾는다.
공화주의란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는 공공철학의 노선으로, 사익이 공익을 침범할 때 동료시민들이 적극 참여해서 공공성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노선이다. 진영대결과 정치양극화로 분열되면서 공공성이 파괴되는 요즘, 공화주의가 왜 필요한 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만약 동료시민들이 경제적 예속상태에 빠져있다면 그리고 특정 인물의 사당화 구조속 팬덤정치와 빠시즘(빠+파시즘)에 빠져있다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시민적 대화를 즐길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동료시민들은 공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예속상태들(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 직장에서 갑질과 성폭력 등 불공정과 불평등)을 막고, 공당의 공천과정에 침투해오는 ‘파벌의 해악’을 막기 위해 ‘국민참여경선제’를 부활시키는 게 급선무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화, 정보화, 후기산업화, 탈냉전화, 탈물질주의화로 표현되는 21세기 전환기적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이런 시대상황은 자본대 노동으로, 정규직 대 비정규직으로, 노조원 대 비노조원으로, 권위주의 대 탈권위주의로,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로, 남성 대 여성으로, 청년 대 장년으로 끊임없이 사회이익을 파편화시키고 개인들을 원자화로 내몰면서 사회변화를 추동한다.
이 같은 사회이익의 파편화와 원자화에 맞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치권, 정당, 언론, 시민단체, 지식인, 정부가 ‘공공철학’을 정립하여 공존과 상생으로 국가통합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거꾸로 정치엘리트들은 극단적인 좌우진영논리나 포퓰리즘에 편승하거나 정치양극화를 부르는 혐오정치를 부추기면서 더 노골적으로 정쟁과 권력투쟁에만 집착하여 민주공화국의 공공선을 훼손한 게 사실이다.
21세기 전환기적 시대상황에서는 사회분야와 정치가 충돌하는 게 특징이다. 파편화와 원자화로 무장한 이익·사회단체의 투입분출(input)은 사회분열과 갈등을 증대시키지만 정치는 정치양극화 등으로 합리적인 이익조정과 효율적인 정책산출(output)에 무능하여 통치불능에 빠진다.
한국에서 자유주의(liberalism)는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자유화와 민주화를 이끌어내면서 사회집단들의 이익투쟁과 다원주의(pluralism)를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런 기여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성격’이공공성을 향한 동료시민들 사이의 ‘공동자유’보다는 개인의 배타적 자유에 빠진 게 사실이다.
자유주의는 이런 속성으로 인해 IMF 이후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신자유주의 및 다원적 이기주의로 극단화되면서 파벌주의와 정치양극화를 심화시켜 사회통합과 국가통합을 어렵게 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21세기 전환기적 시대상황속에서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 및 다원주의가 사회이익을 더욱 파편화시키고 정치양극화를 조장함으로써 국민통합과 국가통합에 한계를 드러내는 만큼,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공철학으로 ‘동료시민의 자유’를 강조하는 공화주의가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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