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운과 실력의 방정식
2024-01-11 06:00:00 2024-01-11 06:00:00
시간의 무심히 흘러 2024년이 시작된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다. 작년 연말 한전 적자와 채권 발행한도가 큰 이슈였고, 유례없는 자회사 중간 배당 실시로 한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길어지고 중동에서 국지전이 확대되면서 국제 유가가 슬금슬금 오르고 있다. 홍해를 지나는 선박들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고 이란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니 만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확전되거나 또 다른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한다면 한전 적자를 좌우하는 유가는 언제라도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큰 우리 경제 전체로는 득실을 따지기 힘들지만, 작년 하반기 유가가 하향 안정세를 유지한 데에는 중국의 기여가 컸다. 경제 규모 세계 2위인 중국은 하루 1100만 배럴 규모의 원유를 수입하는데 이는 전세계 원유 거래량의 20% 수준이다. 만약 셰일 오일과 가스가 미국에서 개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비싼 원유와 천연가스를 사써야 했을텐데 그나마 미국이 화석연료를 자급자족하면서 현재 유가 수준인 배럴당 80달러 수준에서 수급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중국은 작년 상반기까지는 사상 최대 규모로 원유를 수입했지만, 하반기부터 경기가 빠르게 식으면서 11월 원유 수입량은 일일 1033만 배럴을 기록했다. 이는 2022년 11월 대비 9.3% 감소한 것이고, 작년 10월 대비해서는 10.4% 줄어든 것이다. 2024년 중국 경제 성장률은 4%를 기록할 것으로 여러 기관들이 예측하고 있는데 중국 정부의 목표대로 2023년 6% 이상 성장했고, 2024년에도 그런 성장세를 이어갔다면 국제 유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한전 적자는 더 커졌을 것이다.
 
미국의 셰일 오일과 가스 개발이나 중국의 경기 변동에 대해 우리 정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셰일 오일과 가스의 개발은 소수의 고집스러운 벤처 기업가들이 주도했으니 미국 정부조차 의도한 일도 아니었지만, 천조국이라는 별명답게 미국은 불과 10년 만에 세계 최대의 원유 수입국에서 화석 연료 자급자족을 하는 나라로 변신했다. 심지어 2023년 미국은 카타르와 호주를 제치고 연간 1억톤의 LNG를 수출하는 세계 1위의 LNG 생산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COVID-19 방역 정책으로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쏟았지만, 여러 지정학적 갈등과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부동산 경기가 급냉각하고 소비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한전 적자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 국제 유가에 연동되는 SMP와 LNG 수급 상황인데 이 둘은 미국과 중국의 원유 수입과 LNG 수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모두 현재의 에너지 시장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음을 주목해 보자.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민생안정을 위한 상반기 에너지 요금 동결을 결정했고, 장기적으로는 싸고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를 풍부하게 공급한다는 기치 아래 장기 에너지 수급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한전 적자의 원인인 높은 에너지 수입 비용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자. 연간 사용 에너지의 93%가 화석연료이고 이 중 99%를 수입하는 우리나라가 과연 에너지 가격을 통제할 수 있을까? 미국은 셰일 오일과 가스의 축복을 누리고, 중국은 자국 경제 상황 악화로 수입량이 줄어들었지만,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강대국조차 이를 의도하지도 계획한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직후 1년간 자국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폭등해서 민생고가 심했다. 국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된 화석연료 시장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자급자족하더라도 소비자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 화석연료 가격 통제가 어려운 문제는 재생에너지 투자나 원자력 비중을 높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지난 5년간 전세계 재생에너지 투자의 절반을 집행한 곳이 중국이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원유를 수입하는 곳도 중국이다.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량이 전기 사용량의 60퍼센트가 넘지만 2022년 전기요금 폭등을 피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에너지 가격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은 정부가 노력한다고 해서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지정학적 돌발사태나 자연재해, 기후 위기, 경기 변동 등에 의해 언제라도 급변동할 수 있고, 우리 정부가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 정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은 손 놓고 있자는 것은 아니다. 화석연료의 국제적인 수급 균형은 불확실성과 운의 영역이지만, 에너지 사용을 조절하고 효율을 높이고 꾸준한 투자를 통해 자원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은 실력의 영역이다. 2022년과 23년의 한전 적자를 분석해 보면, LNG 수입 가격 인상에 따른 발전 비용의 영향이 60% 이상이었다. 국제 LNG의 현물, 단기 시장은 변동성이 심하지만 장기 계약은 계약 형태나 투자 유무에 따라 얼마든지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2020년 말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사업자들이 LNG를 한국이 원하는 조건으로 가져가 달라고 사정하기도 했었다. 만약 그때 싸고 좋은 조건으로 미국 LNG 수입 장기 계약을 했다면, 한전 적자를 얼마나 줄일 수 있었을까?
 
에너지 정책은 어렵다. 5000만 국민 모두의 일상에 깊숙이 영향을 주지만, 근본적인 가격 변동은 정부라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약속할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장밋빛 목표와 전망은 그만하자.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에 집중하자. 실력을 키워야 운이 맞을 때 빛을 보는 게 세상 이치이고 ‘운칠기삼’이 상식이라면 에너지 정책에서도 불운이 찾아와도 그다음 행운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실력을 기르고, 기대 수준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올 한 해 실력을 키워가는 데 집중하는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기대해 본다.
 
권효재 COR 페북그룹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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