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석에서)왜 최태원이 송구?
2023-12-20 13:18:47 2023-12-20 15:07:42
한덕수 국무총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박형준 부산시장,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참석자들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프랑스 르 팔레 데 콩크레 디시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 제173회 총회에서 2030 세계 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 결과를 바라보고 있다. (국무총리실 제공, 뉴시스 사진)
 
경제계를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 최태원 회장(SK 회장)이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 “열심히 뛴다고 뛰었는데, 결과가 이렇게 돼서 송구스럽다”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솔직히 패자는 유구무언”이라는 말과 함께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책임을 재계에 묻는 국민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언론 평가만 보더라도, 냉철한 판세 분석 대신 헛된 희망과 기대만 부추긴 현 정부의 책임을 1차적으로 물었습니다. 대한민국 외교 수준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빈약한 정보력이 아닌, 현장 진단을 팽개치고 대통령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했던 참모들에 있다고 봐야 정확할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재계의 시선은 냉정하고도 정확했습니다. 2030년 엑스포 개최국 발표(11월29일)를 10여일 앞두고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들 관계자들부터 들었던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사우디의 압승을 예상했습니다. 결선투표 가능성에 대해서도 쓴웃음만 지었습니다. 한 대기업은 대한민국이 얻을 수 있는 표를 “최대 35표 내외”로 내다봤습니다. 막판 대역전까지 바라본다는 정부 분석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컸습니다.
 
‘오일머니’의 위력이 큰 데다, 사우디는 이해관계 중심의 실용적이고도 체계적인 유치전을 펼쳤습니다. 반면 우리는 전략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머니 게임’에서만 진 게 아닙니다. 미국만 쳐다보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극히 편중적인 외교 노선은 중국을 비롯해 중립지대 국가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이는 '119(사우디) 대 29(대한민국)'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엉망이 된 한중 관계에 대한 염려도 내놨습니다. 그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전략을 펼치는 나라는 없다”면서 중국과 패권 경쟁을 펼치는 미국조차 “(우리보다)훨씬 더 중국을 많이 방문해 투자하고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중 관계는)정치나 안보,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는 이성적 게임”이라면서 “생존의 문제로 접근할 문제”라고 규정했습니다.
 
사드 후폭풍에 유통·관광·항공 등의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로서는 향후 중국이 어떤 경제적 보복에 나설지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공급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에서 중국에 원자재 수입을 크게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처지입니다. 제2, 제3의 요소수 사태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대륙 공략도 막혔습니다. 삼성과 LG, 현대·기아차 등 내로라하는 우리 기업들이 중국시장에서 맥을 추지 못합니다. 반도체 활로까지 막힐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을 방문해 기업인들과 떡볶이를 맛보고 있다. 왼쪽부터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조현준 효성 그룹 회장, 윤 대통령, 구광모 LG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사진=뉴시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대장 놀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엑스포 유치라는 국가 차원의 명분이 있었다지만, 순방 때마다 총수들을 대동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1분1초를 아껴야 할 파리 현지에서 재계 총수들과 폭탄주를 겸한 저녁 자리를 벌이는가 하면, 참패 충격에 빠진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재래시장을 찾는 순간에도 총수들을 병풍처럼 세운 채 떡볶이 행사를 가졌습니다. 추운 날씨에 대통령이 올 때까지 젓가락을 들지 못해 식어버린 떡볶이 참사였습니다. 대통령 관저로 총수들을 불러 폭탄주를 돌리고, 주량을 넘었던 몇몇은 술자리를 마친 뒤 구토까지 해야 했던 일화도 유명합니다. 
 
지금은 모두들 고개를 숙이지만,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도 이 같은 제왕적 권위가 유지될 길은 없습니다. 다음 정권도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선지 다들 ‘불가근불가원’을 얘기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직격탄을 맞은 삼성만 해도 ‘특검 수사팀장 윤석열’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특검의 수사 칼날이 ‘이재용’을 정면 겨냥했던 아픈 악몽입니다. SK는 혹여 이번 최태원 회장의 언급이 과거 이건희 회장의 발언(“기업은 이류, 관료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으로 읽힐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입니다.
 
엑스포 유치전도 끝난 마당에 더 이상의 ‘대장 놀이’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 이상 ‘자유’가 대통령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강합니다. 국가경제의 한 축인 기업에게도 이 난국을 돌파할 시간적 여유를 주고, 대통령은 본연의 책임과 의무인 ‘국정’으로 돌아가길 소원합니다. 한마디 더 보태자면, 건강에도 해로운 술은 이제 멀리 했으면 합니다. 대통령이 술을 가까이 한다고 불황으로 인한 소비침체가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편집국장 김기성 kisung0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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