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소설가 김훈이 쓴 <남한산성>의 첫 문장입니다. 이 소설은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 병조호란이 일어나자 남산한성으로 피신한 임금 인조와 조정 대신들, 성에 남은 백성들, 남한산성을 마주하고 선 청나라 군대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대신들이 서울을 버리고 피신하자고 주청한 건 날랜 청나라 군대로부터 빨리 도망쳐 외진 곳에 숨어야만 종묘사직을 연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날 의병들을 기다리자는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은 버렸으되 남한산성에서 항전한다면 전쟁에선 조선이 이길 것이고, 다시 서울로 환궁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인조는 위풍당당하게 서울로 행차하지 못했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 3번 절하고 땅에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하고서야 비로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훈은 훗날 JTBC 뉴스룸에 출연, 인터뷰를 통해 <남한산성> 첫 문장의 의미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정치적 언어의 허망함, 이중성, 뻔뻔함, 그런 것들을 표현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선 '말'들이 넘쳐납니다. 여당과 야당에선 각각 윤핵관과 이재명 대표를 타깃으로 험지 출마론이 제기됐습니다. 신당론과 3지대론, 혁신론, 자강론도 등장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은 가관입니다. 최근 여당과 금융당국은 공매도 금지를 연장키로 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공매도 금지가 불가피하다'고 운을 떼자, 금융당국이 '공매도 허용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다'는 그간 입장을 뒤집은 겁니다.
여당이 당론으로 밀고 있는 김포 편입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급기야 고양·구리·과천·광명·부천·성남·하남의 서울 편입론도 제기됐습니다. 수도 서울에 함께 묶일 때 집값 상승 등 욕망을 부추기는 접근법 외에 그 어떤 정책적 목표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흡사 MB의 '뉴타운'을 연상케 합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9월 '지방시대'를 선포했습니다. 두 달 만에 정부·여당의 기조는 '서울 메가시티'로 돌변했고, 윤 대통령은 자기부정을 한 꼴이 돼 버렸습니다.
지금 정치권을 볼 때마다 <남한산성>의 첫 문장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한 건 47일. 실제 역사에서 대다수 양반들은 임금과 백성의 안전, 나라의 존망은 뒷전이었습니다. "전하, 서울을 버려야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사옵니다. 채비를 서두르소서"라고 말한 데는 제 목숨과 기득권만 챙기려는 얄팍한 속셈, 허망함, 이중성, 뻔뻔함만 가득합니다. 반면 조선의 백성은 청나라 군대에게 도륙당했습니다. 그나마 산 자는 청나라로 끌려가 두 번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은 지금 '말의 잔치'가 국민 안전과 나라 존망을 위한 것인지 뒤돌아볼 때입니다. 험지 출마론에 지역민들의 민생이 고려됐을까요. 공매도 연장 조치는 한국 증시의 백년대계를 숙고한 것일까요. 김포 편입론은 수도권 과밀화와 지역 균형론을 따진 걸까요. 오로지 표만 얻겠다는 정치공학적 셈법만 가득합니다. 뒷날 역사가 2023년의 한국 정치를 어떻게 기록할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최병호 탐사보도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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