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를 일군 주역은 노동자이지만 인식은 바닥권에 있습니다. 강성노조를 뿌리 뽑겠단 정치적 생리가 작용해 더욱 노조에 대한 인식이 추락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요즘 기아 단체협상 과정에서 나온 고용세습 조항이 말썽입니다. 회사에 세습을 요구하는 게 귀족노조라는 반감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정치권이나 사회에 요구하는 재벌 총수일가의 경영권 방어수단이나 상속세 인하 등도 세습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여론이 많으면서도 노동자에게만 가혹한 듯합니다.
기아 노조의 고용세습 조항은 산재 시와 정년퇴직 시로 나눠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조는 재직 중 질병 사망 시 조합원 직계가족을 우선 채용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질병 사망은 산재보다 넓은 범위입니다. 노동자에겐 노동환경에서 비롯된 질병도 산재이지만 사측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질병 원인을 따져 산재 여부를 다투는 분쟁도 많습니다.
어쨌든 적어도 질병사망은 뒤에 요구한 정년 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 근속자의 경우 세습을 요구한 것과 성질이 다릅니다. 상식적으로 세습은 여론 반감을 사지만 산재 위험에서 노동자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실태를 고려하면 생명수당도 필요해 보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시행했지만 사망사고는 끊이질 않습니다. 안전을 높이려면 비용이 들고 그러면 기업경쟁력이 약해집니다. 비용절감을 통해 기업이 수출가격경쟁력을 확보하니까요. 그렇게 기업이 수출을 확대해 국내 낙수효과를 가져오는 논리가 우리 경제를 지배합니다. 이 논리 속에서 안전은 보호장구나 구조물, 원하청 시스템보다 노동자 개인 노력이나 교육 등 돈을 덜 쓰는 방향에 치중합니다. 그렇게 기업은 또 중대재해처벌법 폐지를 요구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자 정치권은 함구합니다. 폐지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암묵적인 동조 아래 노동자가 희생하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좀 크게 보면 사회가 낙수효과를 누리기 위해 열악한 산업 현장에 노동자를 내모는 셈이죠.
여느 기업에도 단체협약에서 고용보장 조항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명무실합니다. 모 기업의 단체협약 조항입니다. ▲회사는 정상적 업무 수행을 위한 적정인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고를 하려는 날 00일 전까지 조합에 통보하고 성실하게 협의한다 등입니다. 노력, 성실이란 모호한 기준은 고용안정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단체협약은 법적구속력을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항을 달기 위해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회사가 힘들면 지금껏 성장에 기여했던 노동자를 쉽게 자릅니다. 그리고 다시 호황이 오면 젊은 인력을 채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노동자를 내보냈던 조선업계가 지금은 구인난을 불평합니다. 썩 동조하기 어려운 행태입니다. 모 기업 단체협약 중엔 ▲경영상 해고된 조합원이 했던 업무에서 다시 채용하려하면 해고 조합원을 우선 고용하도록 한다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또한 사측이 무시할 방법은 많아 보입니다. 업무 형태를 조금 바꾸면 됩니다. 조합원의 경우 기약 없는 재고용만 기다려 생계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재벌일가는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가족경영의 강점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조선왕조를 보면 3대 이상 잘 나간 세습은 없었습니다. 기업은 재벌세습을 옹호하면서 회사를 일으킨 노동자의 노력과 헌신은 몰래 매각, 구조조정 등으로 내팽개치는 게 흔합니다. 고용세습 조항은 ‘물려주고 싶은 좋은 직장’이란 비아냥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재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고용안정을 이루지 못한다는 다른 해석도 우리 사회엔 필요합니다.
이재영 산업1부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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