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지정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지정된 것은 ‘사회과학적인’ 사건이었다. 그간 한국의 사회과학은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훨씬 더 주목했다. 정당 정치는 미군정에 의해 이식된 민주화였고, 시민사회는 ‘시민없는 시민운동’이었고, 경제는 수출-대기업 의존적인 시스템이었다. 현대사는 외세와 독재에 휘둘린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의 선진국 지정이 ‘사회과학적’ 사건인 이유
경제분야만 봐도 경제 종속론, 외채망국론, 한국경제 파국론, 재벌 망국론, 신자유주의 파탄론, 헬조선론 등의 담론이 면면히 이어졌다. 한국경제는 망하기는커녕, 후진국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최초의 국가가 됐다. 그밖에 민주화의 수준, 언론 자유의 수준, 사회복지의 수준도 여느 선진국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2020년 코로나19 당시, 유럽과 한국의 확진자 상황은 K-방역의 우수함을 입증했다.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의 아카데미상 수상, 오징어게임을 비롯한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인 인기, BTS와 블랙핑크로 상징되는 K-pop의 선전은 한국문화 역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흔히 한국경제를 ‘추격형 경제’라고 표현한다. 한국경제만 추격형이었던게 아니다. 한국의 사회과학 전체가 ‘모방형-추격형 모델’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은 제3세계 모델을 수입하려 했다. 인도와 이집트, 남미 모델을 차용했다. 내포적 산업화 모델로도 불렸는데, 핵심은 민족자립경제였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관료, 재벌들은 ‘일본 모델’을 차용했다. 일본의 만주국에서 유래한 관료중심 국가발전 모델을 차용했다. 일본 모델은 현재 한국의 법률 체계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1980년 광주의 충격’ 이후, 한국 진보세력은 소련식-중국식 모델을 차용하려 했다.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이었다. 1991년 소련붕괴 이후,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차용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이슈를 계기로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이 주목받았다.
선진국 시대의 사회과학 – ‘글로벌 보편’과 ‘한국적 특수성’의 일치
그간 한국 사회과학이 ‘모방형-추격형 모델’을 추구했던 이유는 식민지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해방 이후에는 나라가 분단됐다. 미국과 유럽의 서구문명은 ‘정상’으로 간주됐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나머지 비서구는 ‘비정상’으로 간주됐다. 서구 문명, 서구 민주주의, 서구 복지국가, 서양 기술, 서양 철학, 서양 경제, 서양 시민사회론 등을 열심히 배웠다. 그래야, 다시는 식민지 경험을 하지 않고, 부국강병할 수 있고, 분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것을 배우는 모방형-추격형 사회과학은 순기능 역시 많았다. 그러나,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국가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은 일정수준에 오르면 R&D투자가 중요하다. ‘미개척’ 분야를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미개척’ 분야를 뚫어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배워야 하고, 동시에 한국적인 특수성을 밝혀내야 한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좋은 불평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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