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한 것처럼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합심한 프로젝트고요, 그래서 송구스럽지만 원고료는 따로 없습니다.” 몇 년 전, 긴 통화 끝에 제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입니다. 어느 편집자를 통해 알게 된 이와 원고 청탁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평소 관심 있던 주제라 의욕적으로 할 수 있겠다고 대답했더니 위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순간 멍해졌습니다. 원고료도 없는 청탁을 하면서, 그것도 유선상으로 하면서, 원고료가 없다는 이야기를 가장 마지막에 한 상대방에게 몹시 화가 났고, 원고료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청탁을 수락한 스스로에게는 그 이상으로 화가 났습니다. 이미 하겠다고 대답했는데 갑자기 원고료 때문에 못 하겠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수락했다는 데서 매우 절박한 작가가 된 기분이고, 마치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지요.
결국 며칠을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주최 측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원고료 없는 글은 쓸 수 없다고, 다음부터는 원고료에 대한 설명을 가장 먼저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도 꼭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듯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자체로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후로도 원고나 강연 청탁 과정에서 비슷한 일이 몇 차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관련 사항을 꼼꼼하게 따져보곤 합니다. 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그에 대한 대가는 어떠한지에 대해서요.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작가가 저렇게 돈 이야기를 많이 해도 되느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왜 그렇게 따지느냐면서요. 어쩌면 원고료의 ‘시세’가 30년째 동결 중인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연유일 테지요. ‘좋은 취지’, ‘의미 있는 기획’, ‘사회에 대한 사명감’ 등과 같은 단어에 가려 많은 작가가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하고, 당연히 요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못한 결과 원고료 자체가 상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 강연을 하는 것 역시 노동이며, 모든 노동에는 대가가 따라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은 돈만이 대가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책임감과 봉사 정신, 타인에 대한 희생과 배려심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닌 자리들이 있지요. 그러나 그런 직업들조차 돈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피해서도 안 되고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니까요.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가 ‘신성한’ 혹은 ‘사명감’이라는 단어에 가려 무시당하거나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거나 무시하고 싶을 때 거꾸로 그와 같은 단어를 내세우기도 하지요. 어디 ‘사명감’ 있는 ‘신성한’ 일에 감히 ‘돈’ 이야기를, ‘노동’이라는 단어를 붙이냐면서요.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3일 국회에서 ‘공교육 멈춤의 날’과 관련한 질문에 "어느 특정 단체로 인해 교육현장과 교실이 정치투쟁으로 변했고, 선생들이 노동자를 자처하는 단체 때문에 현장이 망가졌다"며 "학생 인권만 강조했던 특정 단체, 정치 투쟁화를 교실로 옮겨온 특정 단체, 신성한 선생님을 노동자로 격하시킨 단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들지 않나요? 위에서도 설명했듯 ‘신성한’과 ‘노동’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 어떤 신성한 일도 노동이며, 모든 노동자는 책임을 다하는 만큼 권리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한승혜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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