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산울림 데뷔 45주년 기념 '리마스터링 LP(바이닐)'는 음악업계와 평단의 의견을 종합하면 '근본부터 다른 재발매'다.
김창완 표현대로 이것은 '쥬라기 공원이 따로 없는' 소리의 상아탑이다. 기존 산울림의 녹음 사운드 자체를 완전히 '수저통 소리'로 만들어 버린, 사운드의 혁신이라 할 만 하다.
최근 유행하는 단순 복각판(CD 디지털음을 LP로 단순 변환)과는 초창기 공정 방식부터 달랐다. 1995년부터(구 대성음반으로부터 양도) 김창완 자택 벽장에 보존했던 기존 산울림 음반 전체의 '마스터 릴 테이프(LP 발매를 위해 녹음한 당시 연주가 담긴 릴 테이프 원본)'가 질료다.
'오리지널 릴 마스터 테이프'에서 아날로그 소리의 기본 파형을 추출하고 오늘날 현대 기술로 세공했다는 점에서, 기존 원본 혹은 단순 재발매식 음반들과는 사운드 자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들어보면, 전반적으로 소리의 해상도가 높아져 다소 흐릿하게 뭉개져 있던 악기 소리들이 선명해지고 광활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45년 만의 하이파이’ 산울림인 것이다.
본격 LP 발매를 앞두고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김창완.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본격 LP 발매를 앞두고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김창완은 "3형제의 기록물이라 단지 보관하고 있을 뿐이던 '릴'이 산울림 녹음 당시 서울스튜디오의 침묵, 공기마저 생생히 구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어쩌면 '산울림 DNA'로 들어가는 '창(窓)'이 될지 모를 이 프로젝트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리도 선명한 '아니 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는 이미 나'가 나온 것인지. 산울림의 원형과 본질을 마주하는 것은 곧 한국 대중음악사를 새로 쓰는 일이자, 외계 유성우를 온 몸으로 맞는 경험과도 같은 것이기에.
이날 인터뷰에는 이번 LP 프로젝트 전체의 디지털 변환 및 리마스터를 맡은 국내 최초 그래미 레코딩 엔지니어 수상자인 황병준(지난 2012년과 2016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녹음 기술상과 최우수 합창 퍼포먼스상)과 이번 LP 기획자로 나선 김경진 대중음악평론가(팝시페텔 대표·과거 한대수, 산울림, 김광석의 박스 세트 기획 및 발매)도 동행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창완이 뽀얀 빛깔의 전통주를 내와 투명 술잔에 쪼르륵 따랐다. 그 조그마한 술잔이 유에프오가 되는 상상을 했다. 맞다, 이제 한국형 사이키델릭이 태동한 그 외계로 단숨에 넘어가보는 것이다.[참고 기사,
(권익도의 밴드유랑)45년 전으로, 산울림 '시간 여행']
최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김창완은 "3형제의 기록물이라 단지 보관하고 있을 뿐이던 '릴'이 산울림 녹음 당시 서울스튜디오의 침묵, 공기마저 생생히 구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왼쪽부터 국내 최초 그래미 레코딩 엔지니어 수상자인 황병준(지난 2012년과 2016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녹음 기술상과 최우수 합창 퍼포먼스상)과 김창완, 그리고 이번 LP 기획자로 나선 김경진 대중음악평론가(팝시페텔 대표·과거 한대수, 산울림, 김광석의 박스 세트 기획 및 발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산울림의 이번 '릴 기반 LP' 프로젝트를 직접 들으시고, 그야말로 '쥬라기공원의 공룡처럼 부활한 것이다. 산울림의 DNA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셨습니다. 관련해서 특히 3집 마지막 곡으로 수록된 ‘그대는 이미 나’의 무그 사운드를 언급하셨는데요. 다른 앨범, 수록곡 중에서도 있었나요. 그간 잊고 있던, 공룡처럼 다가온 소리들이.
김창완: (3집 수록곡 '그대는 이미 나'를 해적판과 이번 LP를 가정용 스피커인 독일사 '그룬딕'으로 번갈아 틀어주며) 이번 LP의 경우 (커팅 단계를 담당한 버니 그런드만 엔지니어가) 얼마나 잘 깎아놨는지, 톤암(턴테이블과 바늘을 연결시켜주는 막대)을 올려도 LP가 재생되고 있는 걸 모를 정도로 정교하게 돌아가요. 가정용 스피커인데도 이번 LP와 비교해서 들어보면, 해적판에서는 베이스를 작위적으로 부스터시킨 부분이 들려요. 그 (작위적인 베이스 부스터) 부분이 '오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요. 한편으로는 무그나 드럼 사운드와 같이 어딘가 구석에 박혀있는지도 모르던 소리들이 열린 느낌도 동시에 받을 수 있을 거예요.
황병준: 맞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겁니다. '억눌러져 있던 소리들이 열려졌다. 과거 LP 컴프레싱 기술로 단단하게 억누르고 가둬뒀던 소리를 활짝 열어 젖혔다.'
김창완: 산울림은 음반 별 다양한 녹음의 방식들을 고루 경험했어요. 아날로그 시대 (릴 마스터 테이프) 녹음 시 2채널과 멀티 채널, 그리고 디지털 시대 (CD) 녹음까지. 그런데 고가의 장비면 결국 아날로그와 디지털, 극과 극은 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존 최고 기술로 제작된 이번 릴 기반 LP를 다시 들어보며 느꼈던 거고요. '그때 우리 릴에 여한 없이 담았었구나, 아쉬운 거 하나 없다' 하면 지금도 표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그때(오리지널 LP를 가르키며)는 늘 '왜 이렇게 녹음 소리가 그랜드펑크레일로드(미국 하드록 밴드)와 다를까' 했었는데요. 결국 릴을 LP로 옮길 때의 기술력 차이가 문제였던 거지요. 당시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네요.
본격 LP 발매를 앞두고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김창완.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산울림 음반 표지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크레파스 그림들과 로고는 지금봐도 음악만큼 미래를 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번 릴 기반 LP 표지들은 원본과 비교해 어떻게 작업이 되는 것일까요.
김창완: 이형우라는 사진 작가분이 도와주셨는데요. 삼성 등 기업의 광고 사진을 찍는, 광고 사진계의 버니 그런드만 같은 분이세요. '산울림을 좋아한다'며 정말 정성껏 원본과 가깝게, 몇년 간 작업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원본 그림들 중 일부는 집에 있고 일부는 없는데요. 이번 작업은 사진을 기반으로 진행했어요.
김경진: 원본에 색상 코드를 대고 직접 비교해가면서, 실제와 똑같은 색감을 내고자 했다고 하셨습니다.
-18분 짜리 대곡 ‘그대는 이미 나’를 당시 앨범에 실은 것 자체는 지금 봐도 파격으로 느껴지는데, 당시로서는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김창완: 그때 아니면 못할 것 같았어요. 그거 낼 당시(1978년)에는, 팬들과 교류가 있거나 그런 게 아직은 아니었던 때고, 우리 삼형제 안에서 제작하던 때였으니까. 그 당시 형제들의 바람이면 '다음 앨범이나 낼 수 있음 좋겠다' 그거 하나였어요.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오래 살았고, 그러니까 몇 년 안되는 사이 곡이 쏟아졌다고 봐야죠.
황병준: 그때 음반사에서는 이 곡 내겠다 했을 때 어땠어요, 진짜?
김창완: 우릴 포기했죠. (일동 웃음) 근데요. 우리가 그렇게 하기까지 진짜 별별 수모를 다 겪은 팀이에요. (다시, 일동 웃음) '아니 벌써'도 원래는 긴 버전이 있었는데, 3분으로 줄여 오라 해서 깎아 도넛츠 판(싱글 LP)으로 갖다 줬었거든요. 2집부터 개인 연습실이 있었어요. 청계천 같은 시절이 있었어요, 저도. 거기서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를 만들었고. 가사 검열도 다 걸려서 개작 엄청했고. 그리고 7집 전까지는 '2트랙 녹음'이었기 때문에 이 곡('그대는 이미 나') 녹음 역시 한 방에 갔던 기억이 있어요. 달력을 석장을 붙여놓고 거기에 '음의 지도'를 그리고 그것만 보고 정신없이 치는 거예요. 하다가 빨라지고 느려지고 엉망진창일텐데도 다시 녹음하고 다시 녹음하고 그렇게 하다 하다 결국 된 거예요.
황병준: 빨라졌다 느려졌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산울림은 고음에서도 살짝 위에서 딱 떨어지는 '자기 만의 샾과 플랫'을 많이 쓰는데, 그건 파파로티나 마리아 칼라스, 그리고 국악 명창에게서 보이는 면들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귀기 서린 음악을 하려면, 음정을 일률적 평균적으로 맞추면 안돼요. 자기만의 음정을 맞춰야 해요. 어떻게 보면 산울림에게도 '국악의 유전자' 같은 게 그때부터 있지 않았나. 앞서 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창완: 근데 저거 다시 하라 그러면 지금은 못해요. 어떻게 다시해요 저걸. (웃음)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설명하시면서, 청춘의 부대낌과 기성의 틀로부터의 저항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고, 이후 그때 제대로 표현못한 부분들을 김창완밴드 '산울림 리마인드 앨범'에 묶어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개작했던 가사 중 아쉬움이 큰 가사도 있을 것 같아요.
김창완: '소녀'라는 곡 제목은 원래 '늑대'였어요. 남자들의 외로움을 표현하려 했던 건데요. 당시 검열에 걸린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가사를 완전히 반대로 써 버린 거예요. 원래 반주가 끝나면 늑대 소리가 '으악 으악' 하고 나는 거거든요.(일동 웃음) 근데 지금은 그게 추억거리에요.
본격 LP 발매를 앞두고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김창완.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초창기 산울림('아니 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는 이미 나' 등)은 한국형 사이키델릭의 원형이었고, 중후반부 산울림('너의 의미', '회상' 등)은 시대를 뛰어넘는 초월성을 획득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김창완: 산울림의 견인차가 됐던 것은 사실 팬들이거든요. 지금의 삼촌-이모 세대들이 산울림을 조카들에게 소개시키고, 또 그 조카들이 커서 어른이 됐고.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어린 친구들이 삼촌이나 이모에게 '산울림 알아?' 한다더군요. 그게 또 산울림을 세대 간 링커 역할을 하게 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형태로요.
김경진: 제가 요즘 산울림 강연을 하면, 90%는 20대 여성분들이 오세요. '어떻게 좋아하게 됐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보고 왔다 하시고요. '그대는 이미 나' 같은 노래를 틀어주면, 어떻게 40여년 전 이런 음악이 있을 수 있냐며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사이클이 순환하고 있는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1996년부터 진행하고 계신 SBS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아침창)'에서 말씀하신 그 유명한 '47개의 동그라미' 얘기를 해볼까하는데요. 선생님께서도 청춘 시절, 찌그러진 동그라미 같은 일상이 많았다고 생각하시나요.
김창완: 그럼요. 근데 지금 돌아보면 그때 '청춘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기억'이 더 커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한데요. 그 청춘의 만용을 일깨워 준 게 지금 이 LP 사건인데요. 왜 영화 '빠삐용'을 보면 주인공이 죽다 살아나가지고, 끌려가서 그런 소릴 듣잖아요. '꿈 속이지만, 넌 사형이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이번 LP가 꼭 그렇게 취조당하는 기분이에요. 내가 지금 과거를 떠올린 게 아니라, 옛날로 소환당한 느낌이에요.
두시간 가량의 긴 인터뷰가 끝날 때 쯤, 직접 내려준 커피잔도, 술잔도 비고, 비스켓 봉지 만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턴테이블 바늘도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하자, 누군가 LP 볼륨을 급격히 줄였다. 삽시간에 거실이 고요해졌다.
-70-80년대로 돌아가는 유에프오가 있다고 하면, 그때도 음악가의 업을 하실 건가요.
김창완: 그게 사실 굉장히 두려운 일이에요. 내가 여태까지 받은 사랑은 어마무지 한데. 저는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그 얘기가 있잖아요. '돌아보니 발자국이 두 개 밖에 없었다'고. 진짜 팬들은 저를 업어다 준거거든요. 이렇게 사랑받을 줄은 몰랐어요. 온전히 내 발로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어요. 절대. 이번 작업하면서도 더 많이 느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아유, 착하게 살아야겠다, 후배들 더 챙겨야겠다' 하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드는 거예요. 너무, 너무, 너무 받은 사랑이 커서.
받은 사랑에 대해 여러분들께 술로 보답을 할게요. (일동 웃음)
지난달 27일 1, 3집 발매를 시작으로 이번 산울림 전집은 오는 22일 2집 발매(스탬퍼 공정상의 문제로 당초 지난달 27일이었다가 연기)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 2달 간격으로 3개 음반(각 2500장 한정수량)이 순차적으로 나오게 된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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