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둘러싼 문해력 논란이 있었다. 한 업체 공지 글에 실린 ‘깊고 간절한’을 뜻하는 ‘심심(甚深)한’을 일부 이용자들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논란 자체가 ‘이 쉬운 단어를 모른다고?’ 하는 놀람에서 비롯되었으니 초기에는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문제 삼는 의견이 많았다. 사흘을 3일이 아닌 4일로 이해한다든지, ‘고지식하다’를 ‘지식이 높다’로, ‘무료하다’를 ‘공짜’로, ‘금일’을 ‘금요일’로 잘못 이해한다는 사례도 나왔다. 이는 ‘요즘 애들’이라는 프레임을 발판으로 독서량 부족과 같은 문제 제기에서, 나아가 학생들에 대한 국어, 한자 교육을 강화하자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MZ 세대 문해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심한’ 오역 논란이 과연 세대론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맞는 건가. 정치적 팬덤이 강한 현실에서 언론 보도에 달리는 댓글들을 접하고 기가 찬 적이 많다. 기자가 전달하는 기사의 본질을 이해조차도 하지 않고 본질을 왜곡하는 댓글을 다는 경우가 허다하다. 댓글 다는 사람들이 전부 MZ 세대인가? 이것이 국어, 한자 교육 강화로 해결될 것인가? 이는 비단 댓글이나 일반 시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명백한 증거인멸을 아무 근거도 없는 증거보전이라고 떠드는 변호사를 본 적이 있다. 같은 변호사로서 정말 부끄러웠다.
인터넷 발달로 개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유입되는 시절이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공유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게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상식적으로 업체에서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로 ‘심심한’ 사과를 사용할 리 없다는 의심을 해보자는 것이다. ‘심심’을 ‘지루하고 재미없다’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내가 아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지 찾아보는 시도를 했으면 어땠을까.
만약 내가 아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더 이상 자신은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남들도 나와 비슷할 것이라는 인식까지 더해지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는 착각까지 들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더 강화하게 된다. 이런 인식에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표현을 하는 사람을 적대적으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 틀렸음에도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쓴 업체에 대해 생각 좀 하라는 식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링>의 작가이기도 한 스즈키 코지는 <공부는 왜 하는가>라는 책에서 “진정한 교양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교양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했다. 공부는 배우는 힘이다. 내가 모르는 것과 마주쳤을 때 알고자 하는 욕구와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힘이 되는 것이다. 즉 공부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과정이 만들어 내는 힘이다. 최근의 문해력 논란은 그러한 노력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심심’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심심한 사과에 대해 나는 심심하지 않다고 하거나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닌 무슨 심심한 사과냐는 식의 몰이해는 위험하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나 궁금함이 있어야 현재보다 나아질 수 있다. 내가 아는 범주에서만 판단하는 것은 경솔하고, 내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한 상대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사이비 전문가의 악의적인 선동이나 왜곡에 이끌릴 위험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 사회공동체의 건강함을 위해서도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물어보고 찾아보자.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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