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록을 쓸 때 통상 오른쪽 면에 정상들이 쓴다. 남의 페이지 뒷장에 쓰는 게 아니다. 사진을 가만히 보시면 윤석열 대통령만 왼쪽 페이지에 조문록을 쓰고 있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방송에 출연해서 했던 말이다.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거라고 본다"고도 지적했고, "의전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얼굴이 뜨거운 일"이라고 탓했다. 그런데 얼굴이 뜨거워진 것은 윤 대통령이 아니라 탁 전 비서관이 되어버렸다. 그의 훈계와는 달리, 각국 정상들이 왼쪽 페이지에 조문록을 쓴 모습들을 사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만 왼쪽 페이지에 조문록을 쓰고 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탁 전 비서관은 근래 들어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윤석열정부를 겨냥한 날선 비판들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윤 대통령 부부의 영국 조문 논란이 있었을 때는 "육개장 먹고 발인 보고 왔다는 것"이라며 조문은 하지 못했다고 야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대사는 "장례식이 핵심"이라며 "새 국왕을 만났고 국장에 참석한 것이 조문"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영부인이 직접 참석해 주셔서 크게 감동했다"고도 했다. 영국 측은 '감동했다'는 일을 두고 탁 전 비서관 등은 육개장만 먹고 온 것으로 비하한다.
정치비평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던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근래 들어 다시 정치 발언에 나서고 있다. 그는 2020년 "검찰이 노무현재단 계좌를 들여다봤다"는 주장을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나자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은 앞으로도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대선을 거치면서 슬그머니 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아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 전 이사장은 윤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TBS 라디오에 출연해 "대통령이라는 자리와 윤석열이라는 인간의 잘못된 만남,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미스매치"라고 힐난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을 가리켜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어떤 정치적 견해를 밝히든 시민으로서의 자유이지만, 공인의 위치에서 정치비평을 그만 두겠다고 한 말의 책임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다.
음모론의 대가 김어준씨는 정권이 바뀌었어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으니 굳이 돌아올 필요도 없다. 그는 여전히 서울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TBS 채널을 통해 팬덤을 위한 방송을 계속하고 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이번에는 "김건희 여사가 착용한 망사포 달린 모자는 영국 장례식에서의 전통"이라며 "그 전통은 로얄 패밀리 장례식에서 로얄 패밀리의 여성들만 쓰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모르고 하셨나 봐. 적어도 영국에서는 그렇다.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알려드렸다"고 조롱했다. 온라인의 각종 커뮤니티에서 김 여사의 '검은 베일' 달린 모자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올라온 것은 그 직후부터였다. 이번에도 김어준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지만, 사과하고 책임을 졌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의 팬덤들에게서 김어준의 잘못을 탓하는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음은 불변의 광경이다.
얼마전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의혹 검증을 위한 범학계 국민검증단'이 김 여사의 학위 논문에 대해 "상식 밖의 논문으로, 대필이 의심된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다. 그런데 검증단을 주도한 우희종 교수 등은 지난 조국 사태 당시부터 '윤석열 검찰'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윤석열정부의 태동 자체에 강력히 반대해왔던 인사들이다. 김 여사의 논문에 대한 국민대의 판단이 엄격하게 이루어진 것인가에 질문은 던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조국 수호'를 외쳤고 진즉부터 윤석열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교수들이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도 어렵다.
'조국의 강'도, '친문의 강'도 건넌 줄 알았더니 건넌 것이 아니었다. 지난 정권이 낳은 과오들에 결코 작지 않은 책임이 있었던 진영의 스피커들이 잇따라 귀환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된 데는 정권교체가 더 나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지 못한 윤석열정부의 책임이 크다. 윤석열정부가 제대로 못했기에, 과거 진영정치를 주도했던 스피커들이 주저하지 않고 부활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 지난 스피커들의 귀환을 당연하게 바라볼 일은 아니다.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는 언제든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과거 진영논리에 갇혀 마타도어와 선동을 일삼았던 인물들이 주도한다면 그 또한 퇴행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당사자들이 발언하겠다면 막을 방법이야 있겠는가. 다만 비판은 하되 사실에 근거해서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증오와 저주가 아닌 합리와 이성의 언어를 사용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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