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수만
2022-09-22 06:00:00 2022-09-22 08:36:53
지난 16일 SM엔터테인먼트의 주가가 급등했다. 창립자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자신의 개인 회사인 ‘라이크기획’과 SM과의 프로듀싱 계약 조기 종료를 검토한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다. 지난 해 여름,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자신의 지분 18.73%를 모두 매각하며 경영권을 넘긴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엎어지곤 했다. 무엇보다 라이크기획의 존재가 컸다. 라이크기획은 프로듀싱 용역을 통해 SM 연간 영업이익의 최대 46%를 가져갔다. 시장에서 말하는 ‘오너 리스크’였다. 그러니 라이크 기획과 SM의 조기 계약 종료는 호재가 됐다. SM-JYP-YG에 이은 SM-JYP-하이브의 신삼국지도 요동칠 것이다. 이수만의 퇴장 예고는 한 시대의 일몰전에 드리우는 노을처럼 보인다. 그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아이돌, 또는 케이팝 산업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가요계에 이수만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1971년,  양희은의 두번째 앨범이다. 1952년생으로 그 해 서울대학교 농대 2학년이었던 그는 이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양희은은 앨범 커버 뒷면에 손으로 “이 판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는 감사의 말을 남겼다. 같은 해 이수만과 백순진이 결성했던 포크 듀오 사월과 오월의 데뷔 앨범도 있었지만 이수만은 녹음만 하고 탈퇴했기에 앨범 커버에는 그의 얼굴이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수만의 첫 음악 행보는 1970년대 포크였다. 당시 시점에서 가장 앞서 있던 장르이자, 한국의 첫 ‘청년문화’다. 
 
그는 이어 록 밴드의 길을 걸었다. 친구들과 함께 ‘들개들’이란 팀에서 활동했으며 1980년에는 ‘이수만과 365일’의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산울림과 송골매의 시대에 이 밴드는 사이키델릭과 프로그레시브를 도입한 ‘진보적’ 사운드를 들려줬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비롯, 방송계의 촉망받던 mc였음에도 대중적 취향에 맞추기 보다는 본인의 음악적 욕망에 충실했던 이 앨범은 이후 이수만의 행보를 상징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유행에 맞추기 보다는 시대를 선도하려는 욕망의 길 말이다. 앨범 발매 다음 해인 1981년, 그는  UCLA로 떠났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컴퓨터 엔지니어링으로 석사를 따고 1985년 귀국, 1987년에 <New Age>라는 앨범을 낸다.  미디를 전면으로 내세운 국내 초유의 실험이었다. 미디는 커녕 사람이 연주하는 아날로그 신서사이저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다. 1986년 인연을 맺은, 국내 전자음악의 선구자 홍종화와 함께 새로운 사운드에 도전했다. 이문세가 이영훈과 함께 한국 발라드의 새로운 문법을 구축하던 시절이었다. 낭만주의의 역사가 구축되던 그 때, 이수만은 낭만의 지평선 너머에 있던 첨단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수만과 365일 때와 마찬가지로, <New Age>의 혁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수 이수만보다는 방송인 이수만을 대중은 선호했다. 2부작으로 발매된 <New Age>의 애매한 성과에 그는 제작자로 방향을 돌렸다. 유학시절 현장에서 목격한 마이클 잭슨-마돈나-바비 브라운으로 이어진 댄스 음악 혁명을 한국에 이식하고자 했다. 춤꾼이자 가수가 필요했다. 귀국후 잠시 일하던 이태원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인연을 맺은 DJ출신의 최진열(후일 SM의 첫 매니저를 거쳐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매니저가 된다)을 통해 현진영을 소개 받았다. 미8군 춤꾼들의 아지트였던 클럽 문나이트에서 그를 훈련시켰다. 강남과 이태원 춤판을 휩쓸던 두 친구, 강원래와 구준엽을 백댄서로 붙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최첨단 장비를 들여와 홍종화에게 프로듀싱을 맡겼다. 현진영과 와와는 그렇게 데뷔했다. 만약 현진영과 와와가 없었다면 이태원은 더 오랫동안 외국인 전용 구역으로 알려졌을 것이고 최진열은 이태원 DJ로 머문채 잊혀졌을지 모른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신화또한 다른 멀티버스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나비효과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현진영은  마약에 손대면서 몰락했다. 그 후 이수만의 행보는 모두가 아는대로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모델로 ‘기획형 아이돌'을 구상했다. 그 결과 H.O.T.가 나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김광석의 죽음으로 공백이 된 1996년 최후의 승자는 ‘캔디'였고 H.O.T. 로 인해 한국 음반 시장의 주역은 10대로 바뀌었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이수만은 아이돌에 쏟아지는 부정적 시선을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돌파했다. 노래를 못한다, 애들만 좋아한다, 국내용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해법을 내놓으며 마침내 결국 케이팝의 시대를 구축했다. 한국 아이돌의 계보와 역사의 기둥을 만들어 온 장본인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지금도 레드벨벳, 에스파 같은 손주뻘 그룹들이 이수만의 센스에 대해 ‘선생님'과 관련된 일화로 증언한다. 
 
혁신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전 부터, 그는 반세기 가까이 음악계를 혁신해왔다. 혹은 혁신이 일어나는 곳에 머물렀다. 영향력을 키워왔고 개인을 넘어 산업을 성장시켰다. 아니, ‘가요계'를 ‘음악산업'으로 바꾼 것도 이수만이었다. 이수만의 시대는 이대로 저물게 될까.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noisepop@hanmail.net)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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