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20일 오전 8시. 시내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크레인과 대형 선박들이 400만㎡(약 140만평)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의 위용을 드러냈다. 여의도의 1.5배에 달하는 규모다.
경남 거제시민에겐 평범한 출근길이겠지만 서문과 남문,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으로 경직된 지역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주민들은 노사 간 대화를, 협력사 대표들은 불법행위 중단을 촉구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1도크(건조장) 농성의 여파에 비하면 조용한 광경이다.
-겉은 고요하네요.
“안은 시끄럽습니다.”
정문에서 만난 회사 관계자는 “오후 2시에 금속노조 집회가 있고 3시 맞불 집회가 있다”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신뢰관에서 만난 직원들은 생계에 대한 불안을 내비쳤다. 한 직원은 “이렇게까지 농성이 길어질 줄 몰랐다”며 “작년에도 대규모 적자를 낸 상황에서 회사가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나중에 다 짜내야 할 고름인데 직영이 다 짜야 한다”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 “만약 오늘 타결이 된다 해도 한 달 동안 못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휴가를 못 간다”며 혀를 찼다.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부지회장이 20일 대우조선해양 1도크 내 0.3평 철제 감옥에서 농성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노사 대립의 한복판인 1도크는 피로와 긴장이 가득했다. 목을 뒤로 젖혀야 꼭대기가 보이는 이곳 맞은편에는 거통고지회 조합원 수십명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울타리 너머에선 유최안 부지회장이 0.3평 철제 감옥에서 29일째 아침을 맞고 있었다. 거통고지회 조합원 약 120명은 지난달 2일 농성에 들어갔고 철제 감옥은 같은달 22일 지어졌다.
세계 최대 규모인 1도크는 2만1000평 규모로 축구장 8개 크기에 달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최대 100만 DWT(재화중량톤수, 길이 515m)급 유조선과 폭 120m, 높이 130m의 대형 플랜트를 건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은 감옥이 신발 속 돌이 되어 세계 최대 규모 건조장의 진수를 막고 있다. 사측은 거통고지회의 1도크 점거로 현재까지 7000억원 손실을 입었다고 추산한다.
조합원 차모씨는 최저임금에 가로막힌 중노동의 고통을 토로했다. “지금 파업하는 사람들 연령을 보십시오. 40대 이상이 태반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조선소에서 언제부터 일 했겠습니까. 10년 내지 20년이죠. 이런 숙련공들에게 최저임금이라는 기준으로 월급을 주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거통고지회는 임금 30% 인상 요구안이 조선업 구조조정 직전 임금 수준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차씨는 조선업 불황 때 업종을 바꾼 사람들이 전업을 권하지만 삶의 터전이 거제여서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외지에서 가족과 좀 떨어져 있더라도 평균 700만원 이상 받는데 조선소에서는 쌔가 빠지게 일 해도 300만원 받을둥 말둥 하는데 뭐 한다고 그렇게 고생하고 있느냐는 소리를 들으면 올라가고 싶다”며 “부모님이 여기 계시고 거제에서 산 지 50년째인데 쉽게 정리하고 이 나이에 타지 생활하는 건 싫다”고 말했다.
수입이 줄어 고생하고 있지만 반드시 매듭을 짓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차씨는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시작한 것이니 끝을 보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양대석 대양기업 대표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양 대표는 “옛날에는 지금보다 160시간을 더 일했다”며 “지금은 208시간을 작업하는데 임금이 3분의1로 줄어든 게 맞고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양 대표는 공적자금 12조원이 들어간 대우조선해양이 적자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임금을 올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월급 올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조건이 안 된다”며 “또 여기서 국민 혈세로 메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국민의 지탄을 받을 수 있어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고 했다.
이날 총파업에 들어간 금속노조는 오후 2시30분 옥포조선소 앞에서 연대 투쟁을 시작한다.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에선 3시 맞불 집회를 열 예정이다.
금속노조는 “정부의 제 역할은 산업은행을 움직여 대우조선 원하청 사측이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저임금 구조와 인력문제 해결을 통한 조선산업 발전, 전국 조선소 하청 노동자의 미래,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이라고 밝혔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조합원들이 20일 대우조선해양 1도크에서 농성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대우조선해양은 올해 수주호황을 맞고 있지만 난관이 많다. 26척 59억3000만 달러를 수주해 올해 목표의 66.4%를 달성하고 약 3년6개월치 일감을 모았다.
사측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선박 계약 해지, 생산 인력 부족과 수급난,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위축 등 ‘퍼펙트 스톰’에 빠졌다며 발을 구른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영업손실 1조7547억원으로 2016년 이후 5년만에 연간 실적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2~3년간 저조한 수주로 인한 매출 급감과 강재 등 자재 가격의 급상승으로 약 1조3000억원 상당의 공사손실충당금 등을 반영한 결과였다. 올해 1분기도 공사손실충당금 4000억원을 반영해 영업손실 4701억원을 기록했다. 부채비율은 547%다.
지난 5월에는 러시아 선사의 중도금 미납을 이유로 LNG 쇄빙선 세 척 중 한 척에 대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 때문에 공사 수주 규모는 기존 1조137억원에서 6758억원으로 줄어드는 등 러시아 리스크가 이어지고 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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