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 규제혁신센터장
아파트단지 입주자 대표를 뽑고 있다. 한 후보자의 공약 하나가 눈에 띤다. “우리 아파트를 지나는 보행자들을 차단하겠습니다.” 주변아파트 주민들이 단지 내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 노인분은 “아파트를 함부로 지나다니게 하면 안 된다. 아파트 품격이 떨어진다”라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10년을 살았어도 사건사고 한 번 없었는데 통행금지라니 좀 뜬금 없기는 하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비싼 아파트에 살면 ‘지위나 인격’을 나타내는 ‘완장’을 찬 것처럼 행세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파트의 브랜드로 사람을 저울질하고 대하는 듯하다. 천정부지 오르기만 하는 아파트 가격 탓에 10억 원이란 돈의 가치조차 우습게 여기는 시대가 됐다. 우리사회에서 아파트가 화제의 중심이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처럼 아파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세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사회가치관도 혼탁해졌다.
요즘 김포장릉 주변의 고층아파트가 논란이다. 유네스코(UNESCO)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앞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이것이 문화재보호법 13조에서 정한 '역사문화 환경보존지역'의 범위 내 즉, 왕릉외곽경계의 500미터 안에 있다는 것이다. 명백한 위법이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쪽은 법을 위반했으니 철거하자는 입장이고 다른 한쪽은 다 지은 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입장이다.
건설사에서는 언론과 법조계, 국회를 통해 철거를 막으려 총력을 다 할 것이고 관련부처나 공무원들도 책임과 처벌을 면하고자 적당히 타협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은 대체 불가한 것이다. 이 사안은 향후 문화유적지의 보호는 물론 ‘법의 존엄성’이나 ‘과정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의 가치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근간에는 아파트에 대한 몰입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국가소유의 토지나 공공장소를 아파트로 둔갑시키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릉의 군 골프장에 이어 육군사관학교나 과천정부청사 앞의 시민공원조차 아파트 부지로 만들고자 했던 발상이 기가 막힌다. 육군사관학교의 자리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 몽골군과의 격전지, 조선시대 수도방어의 전진기지였다.
6.25전쟁에서 입학 25일차의 육사1, 2기 생도들이 군번도 없이 참전해 전사한 청춘의 혼이 깃들어 있다. 육사는 일반적인 대학이 아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예산을 들여 이를 옮기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 팔려고 하니 그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무엇을 위해 이러는 것일까?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결과가 다른 가치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아파트 자본주의' 이면에는 건설사,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한다. 3기 신도시의 공공택지가 무려 59%나 민간건설사에 넘어가고, 이에 아파트 건설을 통한 이익이 무려 8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정착민들의 땅과 집, 가게 등을 반강제로 수용해서 넘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는가 묻고 싶다. 아직도 전국에서 이런 행태는 벌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아파트가 부족하다고 떠들어대면서도 올해 아파트 구매자의 46%가 임대를 목적으로 샀다하니 이해가 안 된다. 이 점에서 불경기니 무주택 서민이니 하는 말은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평생 건설업에 몸담았던 어느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아파트 개발은 한마디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개발로 돈만 된다면 방약무인 즉, '사람이 없는 듯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아파트 만능의 사회에서 건설사와 이해관계자들은 방약무인의 행태를 마다하지 않는다. 일부의 거대한 이익은 다른 가치의 희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아파트에 대한 욕구는 도를 넘었다. 마치 사회전체가 아파트에 편집증을 보이며 몰입하고 있는것 같은 모습이다. 외국인들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사회심리학자 매슬로(Abraham Maslow)의 욕구 5단계에 따라 우리사회에서의 아파트는 1~2단계인 주거와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에 그쳐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파트를 통해 4~5단계의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까지도 채우려 하고 있다. 아파트를 통해 자산증식과 신분상승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것이다.
마치 아파트가 조선시대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위해 돈 주고 얻어내던 벼슬의 신분증인 '공명첩(空名帖)'이라고 여기는 것인가? '아파트 완장'을 찬 일부사람들은 여전히 경비원을 멸시하고, 이웃주민의 통행을 막고, 아파트 가격으로 사람을 차별하려 할 것이다. 불안과 조급증으로 잠을 설치는 서민들을 아파트라는 '신기루'로 휘몰아 가는 건설사의 마케팅도 화려하게 펼쳐질 것이다. 아파트 자본주의의 질주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 규제혁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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