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2017년 국내 출판계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명징하게 비추는 ‘거울’이었다.
전직 대통령의 구속과 조기대선은 국가와 정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국민들은 새 대통령의 국정운영 철학에서 희망과 미래를 보고자 했다.
안정된 정국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출현시켰다. 특히 현 시대 여성들의 삶을 반영한 페미니즘 도서들이 다수 출간돼 집중 조명을 받았고,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 문제를 공감과 연대의 차원에서 보게끔 했다.
소셜미디어(SNS)는 책을 혼자만의 감상에서 함께 공유하는 개념으로 재정의했다. ‘소셜팬덤’을 등에 업은 일반인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입소문이 난 서적은 출간 시기에 상관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이른바 ‘역주행 열풍’으로 확산됐다.
올 한 해 국내 출판시장의 흐름을 서점 판매동향과 평론가, 출판인의 의견을 취합해 되돌아 봤다.
올 한 해는 정치·사회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 어느 해보다 컸던 해였다.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이어진 장미 대선으로 헌법·정의를 바로 보거나 새 국가의 역할을 묻고 답하는 책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독자들은 책을 보며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에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했다.
상반기에는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 차병직 변호사 외 2명이 집필한 ‘지금 다시, 헌법’ 등이, 하반기에는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 MBC 해직기자 이용마의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국가에 대한 관심은 사회 현상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져 정치·사회 비평서의 판매 증가를 견인했다. 지난 4일 예스24가 발표한 ‘2017 베스트셀러 분석 및 도서판매 동향’ 자료에 따르면 정치 사회 관련 도서 판매량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1.6% 증가했고, 특히 관련 비평서의 판매 신장률은 68.6%에 달했다.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는 서점가에 ‘문풍(文風)’이 거셌다. 후보 시절 국정 운영의 철학과 비전을 담은 ‘대한민국이 묻는다’부터 그의 사진이 표지 전면에 실린 타임 아시아판, 어린이들을 위한 위인전 ‘Who? Special 문재인’ 등 다양한 서적들이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참여정부시절 쓴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은 특별판으로 재출간돼 현직 대통령 자서전 최초로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명견만리’ 시리즈 역시 문 대통령이 여름 휴가철 읽고 추천한 직후 전주에 비해 판매량이 급등하면서 열풍을 체감케 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87년 체재 이후 개헌으로 압축될 수 있는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마련될 것인가 하는 국민적 관심이 컸다”며 “새로운 대통령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한국 사회의 장기적인 비전을 어떻게 그려낼 지에 대한 관심이 출판 시장에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장은 “올해 대통령 관련서의 부상은 일종의 '팬덤' 현상의 일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며 “기존 대통령 당선 때보다 젊은 지지층들을 중심으로 결집했던 영향력이 컸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올해 1월 자신의 국정 운영 철학을 담은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펴낸 문재인 대통령이 한 서점의 일일 직원으로 일하며 시민에게 사인해주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우리 모두는 김지영’…페미니즘 도서 각광
정국이 안정되면서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특히 페미니즘 도서들은 ‘현시대 여성들의 자화상’을 리얼하게 그려내며 성 차별이 여전한 한국 사회를 바로 보려는 움직임으로 확산됐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올 한 해 페미니즘 이슈를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시킨 '기폭제'였다. 1982년생 김지영씨를 주인공으로 세워 여성들이 겪는 경력단절, 독박육아 등의 문제를 현실감 있게 그려냈고, 다양한 독자층이 현 시대 여성들의 차별적 상황에 공감하는 계기가 됐다.
정치권에서 소개되거나 동명의 다큐프로그램에 차용된 후에는 ‘김지영 열풍’으로 번지기도 했다. 민음사에 따르면 지난해 출간됐음에도 책은 올해 상반기부터 연말까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르며 총 50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는 “소설 기획 단계에서 젊은 여성 독자들의 공감대에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사회 전체가 함께 호명하는 책이 될 것이란 기대는 못했다”며 “’82년생 김지영’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건강한 스피커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영 열풍’을 계기로 하반기까지 다른 페미니즘 관련서들도 잇따라 출간됐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젊은 여성작가 7인의 단편소설을 묶은 ‘현남 오빠에게’, 지난 8월 내한한 미국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의 신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에 날카로운 문제제기를 한 ‘다른 사람’ 등이 크게 주목 받았다.
지난 4일 교보문고의 ‘연간 베스트셀러 및 결산 발표’ 자료에 따르면 페미니즘 관련 여성학 분야는 출간종수가 매년 평균 30종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평년 대비 2배가 넘는 78종이 출간된 것으로 집계됐다. 판매량도 전년 대비 2.1배 신장했다.
장은수 대표는 “과거 여성 관련 책들이 주로 담론의 차원에서 얘기 됐다면 올해는 삶의 현장, 즉 일상에서 삶의 문제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 차이”라며 “결국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될 만한 솔루션이 나올때까지 앞으로도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백원근 소장은 “‘82년생 김지영’은 일상의 성차별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사회적 의식에 기름을 부은 것과도 같았다”며 “아직은 이런 에너지가 축적이 되고 있는 시기다. 해결이 안되면 결국 정치적으로 의견이 강력히 분출될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올 한 해 페미니즘 이슈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킨 조남주 작가는 지난달 김이설, 최정화 등 6명의 여성작가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페미니즘 단편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를 출간했다. 사진/다산북스
‘SNS 팬덤’ 역주행 신드롬을 만들다
올해 해시태그(특정 핵심어 앞에 ‘#’를 붙여 검색을 용이하게 하는 기호)나 사진 등 이미지를 활용하는 소셜미디어(SNS)의 열풍도 거셌다. SNS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를 공유하면서 일종의 ‘팬덤’을 형성했다. 입소문이 난 책들은 출간시기와 상관없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차트를 역행하는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는 올 한 해 역주행 열풍을 주도한 대표 도서였다. 지난해 8월 출간된 책은 SNS 상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올해 상반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따뜻한 '말'에 위로를 얻은 독자들이 책의 사진과 글귀를 공유하면서 연말까지 베스트셀러 상위권 흐름을 이어갔다. 책은 예스24의 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총 14회, 8주 연속 최장 기간 동안 1위를 차지했고, 교보문고의 집계에서도 올해의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선정됐다.
‘언어의 온도’ 외에 지난해 9월 출간된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과 지난해 7월 SNS 계정 ‘책 읽어주는 남자’를 운영하는 전승환 작가가 펴낸 ‘나에게 고맙다’ 등도 독자들의 입소문과 저자들의 꾸준한 강연 활동, SNS에서의 소통 등이 어우러지며 서점가에서 재주목받았다.
사진을 찍어 올리기에 좋은 책들은 ‘인스타용 아이템’으로 뜨기도 했다. 일러스트와 함께 주변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답게 살아가는 법을 설명하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의 철학적인 메시지를 그림과 함께 배치해 주목을 끈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SNS 네 컷 만화 ‘행복한 고구마’를 그린 도대체 작가의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등이 특히 주목받았다.
장은수 대표는 “좋은 콘텐츠만 있다면 누구나 기존 미디어의 도움 없이도 팬덤을 만들고 소통할수 있는 시대”라며 “초연결사회가 만든 하나의 현상으로, ‘소셜팬덤’이라는 용어가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고 분석했다.
백원근 소장은 “SNS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필력 있는 필자들보다 SNS 전파력이 있는 작가들의 책이 더 많이 팔리는 시대임을 확인시켜줬다”며 “독자들이 읽고, 공감을 하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접목되는 이러한 흐름이 갈수록 확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올 한 해 역주행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언어의 온도'와 '82년생 김지영', '자존감 수업'. 사진/뉴시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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