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진정한 적폐청산
2017-12-21 07:00:00 2017-12-21 07:00:00
전재경
서울대 글로벌환경경영전공 겸임교수
요즘처럼 '적폐(積弊)'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없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말은 '오랫동안 쌓인 폐단'이라는 뜻으로, 사실 이렇게 풀어써도 어려운 단어다. 청산(淸算)이라는 말도 나온다. '오랫동안 쌓여 굳어진 것을 말끔히 씻어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이 적폐며, 이를 청산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가.
 
단어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과거 군사정권에서 추진됐던 새마을운동과 10월 유신, 삼청교육 그리고 이후 전개되었던 역사 청산도 무엇인가 묵은 것을 씻어내고 싶어 시작된 것들이었다.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도 적폐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국무회의에서 꺼냈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적폐청산을 운운했다. 적폐청산 구호를 외쳤던 주체가 지금은 청산의 대상이 된 것은 역사적 비극이다. 정권의 정통성과 정책의 선명성에서 역대 어느 정권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문재인정부가 과거 '위로부터의' 개혁을 연상시키는 적폐청산을 주창하는 현상을 보고 역사가 회귀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적폐는 사회 구석구석에 쌓여 있다. 부정부패만이 적폐가 아니다. 빈부격차를 비롯해 가문과 성별, 학력, 용모 등에 기반을 둔 시대착오적인 차별도 적폐다. 갑질과 독점을 지속하기 위한 기술·제도적 진입장벽도 적폐다. 무의식적으로 범해지는 성희롱이나 따돌림도 적폐다. 공공조달 입찰에서 중소기업이나 협동조합이 응찰할 수 없도록 실적이나 규모를 높게 설정한 것 역시 말할 게 없다. 출신대학의 서열을 매겨놓고 낮은 서열의 대학 출신이 높은 서열의 대학교수로 진출할 수 없도록 한 장벽, 교수와 강사의 강의수당을 차별하는 행위, 몇 시간씩 걸리는 먼 곳에 전문가를 불러놓고 자문 수당이라고는 쥐꼬리만큼 지급하면서 아이디어와 지식을 헐값에 얻으려는 일도 모두 청산되어야 할 적폐다.
 
때문에 적폐청산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지속적으로 청산을 실천하고 적폐의 뿌리를 뽑는 것은 무덤의 잡초를 제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법과 제도 개혁으로 적폐를 청산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적재적소에 정비되지 아니한 법은 그 자체가 적폐다. 정부는 흔히 개혁을 시도한답시고 특별법을 만들지만, 제때 퇴출되지 않는 특별법은 오히려 혹이 된다. 불합리하거나 행정 편의주의적 규제도 전형적인 적폐다. 우리나라나 해외 가릴 것이 수많은 정부들은 당선 직후부터 퇴임 직전까지 규제개혁을 외쳤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 되돌아보면 규제를 개혁한 만큼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규제가 겹겹이 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규제의 근거가 되는 법령들을 때 맞춰 정비하지 않고 쌓아두기만 해서다.
 
법령이 적폐의 온상이 되는 경로를 보자. 헌법과 민법, 상법, 형법 또는 소송법처럼 준칙 중심으로 편제된 기본적 법률들을 제외한 수많은 행정법령들은 공무원들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든다. 공무원들은 이런 법령들을 만들어 쓰다가 자리를 이동할 때 폐지하지 않는 게 태반이다. 많은 사람들은 국회가 법률을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무원들이 법안을 만드는 정부입법이나 공무원들이 입안해서 국회의원의 이름을 빌려 통과시키는 의원입법이 대부분이다. 상당수의 규제는 법률 하위의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존재하는데 이런 하위법규들은 모두 공무원들이 만든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지만 공무원은 물러날 때 법령을 남긴다는 말이 유명할 정도다.
 
적폐청산을 마치 인민재판의 구호처럼 써서도 안 된다.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으로 공격하는 것은 더욱 안 된다. 진정으로 적폐를 청산하고 싶은 정부라면 자꾸 법령과 규제를 만들어 낼 게 아니라, 묵은 법령들을 정비하고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 5년이란 재임 기간이 길어 보여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공약 이행에만 얽매인 채 낡은 법령과 규제를 정비하고 창조적 정치와 행정을 펼치지 못한다면 퇴임 때는 임기가 시작할 때 처음 섰던 출발선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문재인정부에서는 최고통치권자나 참모들이 법률 전문가이면서도 법령의 청산과 규제개혁을 표방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국가를 경영적 관점에서 본다면 법적 안정성을 위해 1000년 동안 그대로 써야 할 기본법들이 있다. 또 합목적성을 위해 필요할 때 만들고 적기에 폐지하거나 정비해야 할 행정법들도 많다. 법을 정비하지 않고 정책이나 행정만으로 개혁을 이룩할 수는 없다. 여야가 대치해 공전을 거듭하는 쟁점법안들이 개혁의 발목을 잡는 게 사실이지만, 쟁점법안이 아닌 것들 중에 적폐를 안고 있는 법률도 상당하다. 주로 중소기업이나 소시민들이 당사자인 경우다. 교육과 육아, 복지, 자격취득, 취업규칙, 계약체결, 조달, 입찰, 방송, 공연, 광고, 용역, 주택분양, 교통, 통신, 물류 등의 법률에서 적폐가 넘친다.
 
전재경 서울대 글로벌환경경영전공 겸임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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