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전국적으로 퍼진 적이 있었다. 시작은 철도 민영화와 불법 대선 개입이 뜨거운 감자일 무렵 고려대학교의 한 학생이 올린 대자보였다.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라는 만연한 인식이 무색하게도, 너나 할 것 없이 안녕하지 못 함을 외쳤다. 그 뜨거운 열기도 어느덧 2년 가까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안녕들하십니까>에 버금가는 파급력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대자보가 대학생들이 목소리 낼 수 있는, 내부의 공론장 역할을 함은 변하지 않았다.
올해 경희대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 존폐’를 주제로 청운관(교양학관) 게시판이 뜨겁다. 시작이 3월 30일이고 아직까지 관련 대자보 글이 올라오니, 두 달여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3월 30일, 경희대학교 철학과 김 모군이 <총여학생회는 무엇과 싸우고 있습니까>라는 대자보를 최초 게시하였다.
다음은 대자보의 주요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 이처럼 총여학생회는 여학생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학생들의 자치회비를 그들이 행하는 각종 캠페인과 행사에 사용하는 단체입니다. 경희대 역시 과거 서정범 교수 사건 이후 총학생회 조사 결과 7,012명의 투표자 중 62.5%가 총여학생회 해체 후 성평등 위원회 등 새로운 자치기구 신설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중략)... 여학우 여러분은 ‘교내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바가 있습니까? 입시 전형, 학점, 교내 활동 등에서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무조건적인 산술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값싼 공산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략)... 진정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바는 양성 간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이고 일차원적인 산술적 평등과 무조건적인 여성만의 권익 신장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의 공정한 경쟁과 궁극적 성평등입니다. 교내 8개소가 존재하는 여학생 휴게실과 쉬고 잘 곳이 마땅찮은 남학생들은 차별의 사례가 아닙니까? (후략)
그가 언급한 ‘서정범 교수 사건’은, 국내의 권위 있는 국어학자이자 경희대 교수인 故 서정범 교수가 무속 신앙 연구를 위해 무속인과 공동 연구를 하던 중, 무속인이 서 교수를 성추행으로 신고했던 사건이다. 경희대 총여학생회는 서 교수의 퇴직을 강력히 요구했고, 결국 그는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허나, 서 교수에게 은밀한 관계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무속인이 앙심을 품고 허위 고소한 것으로 드러났고, 결국 그는 무혐의를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충분한 상황 판단 없이 피해자의 주장만을 근거로 서 교수의 퇴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총여학생회는 여러 이유를 들어 사과를 거부했다.
이 대자보는 교양 수업을 위해 오가는 각기 다른 과에 수많은 학생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총여학생회의 폐지다. ‘성차별 금지’라는 총여학생회의 적이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즉, 총여학생회에서 그들의 존립 근거로 남녀 취업률 등 사회적인 성차별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교내’에서 이뤄지는 성차별이냐는 것이 골자다. 만약 교내의 성차별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남학생에게도 똑같이 자치회비를 걷으면서도 투표권은 남학생에게 없는 총여학생회는 역차별일 뿐이다. 이후, 총여학생회의 존폐를 두고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틀 뒤, 심 모군의 <당신은 무엇과 싸우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반박 대자보가 올라왔다. 심 군은 김 군의 대자보 글의 근거를 “첫째, 외부 사회를 배제한 교내에서 성별을 이유로 받게 되는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교내 60% 이상의 학우가 총여학생회의 폐지를 원한다. 셋째, 총여학생회는 여학우만을 위한 조직이면서 남성의 자치회비로 운영되며, 이로 인한 역차별 사례 역시 크다.”로 요약하고, 이에 대해 조목조목 하나씩 반박하였다.
(...)‘폭력’이란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전제하는 가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불평등이란 거창한 개념도, 낯선 것도 결코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또한 학우님께서는 취업률 등의 지표가 학교 내적 문제와는 별도의 사회문제라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 역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사회적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의 경우 올바른 교육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그렇기에 교육기관인 대학에서부터의 성평등 실현은 한국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60퍼센트 이상의 학우들이 총여학생회를 원하지 않으므로 총여학생회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차별과 피해의 영역을 다수결에 맡겨버리는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중략)... ‘당장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평등한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지도 않은 사회에서 소수집단의 권익 증진 사례를 들어 지배집단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차별에 대한 금지조차 차별이라고 말하는 꼴과 다를 바 없습니다.(후략)
요약하자면 사회의 불평등은 결코 ‘사회 내에 존재하는’ 대학에서도 피해 갈 수 없으며, 교육기관인 대학에서의 성 평등 실현이 곧 사회의 그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가 남긴 잔재는 쉬이 없어지지 않으며, 그런 사회 내에서 소수 집단의 권리 추구를 역차별이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총여’에 관한 대자보는 한 차례씩의 잽으로 끝날 기미가 아니었다. 얼마 뒤, 게시판엔 최 모군의 재반박 글이 붙었다. 제목은 <우리는 지적 폭력과 싸워야 합니다>
(...) 젠더적 폭력이 정말 우리 학교에서 자행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사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총여학생회는 그러한 폭력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중략)... 제가 그러한 생각 끝에 이해한 첫 대자보는 바로 위의 질문들에 대해 총여학생회가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총여학생회에 기대하는 바를, 우리가 십시일반 모아 지원하고 있는 이유를 총여학생회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교내에서 어떠한 폭력이 일어나는지 혹은 우리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폭력이었던 것은 무엇이 있었는지를 학교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총여학생회에 바라고 있는 바이며 “대표 없는 과세”임에도 불구하고 총여학생회에 대한 지원이 정당성을 얻는 이유입니다. ...(중략)... 이는 그만큼 학생들이 젠더적 폭력에 공감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학생의 60%가 반대한다는 것은 다수결의 폭력이 아니라 총여학생회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표지로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총여학생회는 존립 근거를 잃습니다. 요컨대 중요한 문제는 총여학생회가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지 젠더와 폭력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부딪히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후략)
최 군은 대자보에서 학교에서의 젠더적 폭력의 실체가 없으며, 그렇다면 심 군이 주장한 사회적 폭력과 성차별을 해결하는 데 총여학생회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또한 경희대학교 학생 대부분은 성차별을 없애고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동의한다며, 총여학생회 존립 반대 여론이 소수의 권리에 대한 폭력이 아닌 총여학생회가 학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 한 결과임을 역설했다.
이외에도 몇몇의 대자보 글이 더 추가로 올라온 뒤에야, 총여학생회는 <우리시대 ‘김커피’에게 전하는 첫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답변을 달았다.
(...) 외모는 우리사회에서 여성을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이기 때문에 외모를 가꾸는 것은 여성에게 포기할 수없는 굴레이자 강요된 선택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사회화 과정으로, 외모 가꾸기에 대한 집착을 놓기 쉽지 않습니다. ...(중략)... 성범죄 피해자가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공포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은 잠재적인 가해자, 여성은 잠재적인 피해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범죄 피해자 대부분이 왜 여성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중략)... 특히, 여고생과 여대생은 나이어림, 풋풋함, 순수함 등의 성적인 존재로 표현됩니다. ...(중략)... 그리고 여성이 만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면 민폐를 끼치는 것뿐만 아니라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여성’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받습니다. 이렇게 술자리에 잘 참석하지 않고 술을 빼는 사람은 공동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렇듯 여성은 공동체문화에 적응하기 힘들고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는 이러한 경험은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에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중략)... 얼마 전 정경대 화장실통신에 ‘정경대 이쁜이들 따먹을 수 있는 공창제실시’라는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개인의 도가 지나친 낙서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하지만 이는 대학에서 문제가 되는 문화를 특정 개인/집단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가 사회에서 학습한 차별적인 인식이 폐쇄적인 문화 속에서 더욱 심화되는 것입니다. (후략)
총여학생회가 답변을 내놓기는 했으나, 논란은 5월 중순을 향하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총여학생회의 글이 올라온 이후인 5월에도 찬반 대자보가 각각 하나씩 추가 게재되었다. 총여학생회는 추후에 남학생 자치회비 문제, 총학생회 산하로 개편하라는 주장에 대한 입장을 추가 대자보로 밝힐 것이라고 한다.
사진/바람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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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관 앞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역시나 제각각이었다. 이과대학의 송 모군은 “폐지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남녀의 편가르기 싸움이 되는 소모전이 되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혔고, 경영대학의 최 모군은 “폐지하면 안 되죠. 기본적으로 ‘총여’의 존립 목적부터 무엇인지 따져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가치관이 진정 무의식적인 남녀 차별을 넘어섰느냐?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존재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방향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맞겠죠.”
하지만 경희대 학생들의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총여’를 검색해보면, 오래 전부터 총여학생회에 불만의 목소리가 누적되어 왔음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생리공결’의 꼼수 사용이나 남학생 자치회비의 사용 등에 대한 이의제기가 많았다. 더해, 60%가 넘는 총여학생회 폐지 여론에서 보듯이 총여학생회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좋지 않음은 사실인 듯하다. 존립이냐 폐지냐를 따지기에 앞서 총여학생회의 역할과 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여러 의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이 필요한 때이다.
경희대 커뮤니티. 캡쳐/바람아시아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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