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판정을 내리면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또한 채무 재협상은 없다는 기존의 견해를 고수하고 있어 그리스 은행권의 자금줄이 막히게 됐다.
ECB는 4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그리스 정부가 국제 채권단과 성공적인 결론을 이끌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며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한 대출 승인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ECB는 "담보 인정 중단 결정은 현재 유로시스템 규칙에 따른 것"이라며 "이번 조치는 그리스 금융 기관의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ECB의 예상과 달리 발표가 나간 직후 한동안 잠잠하던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와 뱅크런(예금 대량인출)을 둘러싼 위기감이 되살아났다.
미국의 다우존스 지수는 이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100포인트가량 상승하는 중이었으나, 이후 하락세로 전환했다. 그리스 국채 금리는 상승 폭을 더욱 키웠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은 다음달이면 그리스 정부가 지닌 현금이 모두 소진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지난 2010년 5월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는 국제 채권단이 제공하는 2400억유로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해왔는데, 이 프로그램은 오는 28일이면 끝이 난다.
피터 부크바르 린제이그룹 전략가는 "ECB의 결정은 예금자들의 우려감을 부추겨 뱅크런이 더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그리스 정부가 트로이카 채권단과의 채무 협상에 성공해야 ECB는 그리스 담보를 다시 인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왼쪽)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활로로 여겨지던 ECB가 그리스에 등을 보이자, 치프라스 총리에게 공이 넘어왔다. 그가 벌이는 부채 재협상 논의가 성공해야 그리스는 기한 내에 채무를 상환하고 자국 은행에 긴급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치프라스는 이전의 강경한 태도를 버리고 어떻게든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유로존 통합과 안정을 강조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치프라스는 "그리스는 분열하기보다는 유로존을 끌어안기를 원한다"며 "구제금융에 관한 논의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이 종전보다 한 층 수위가 낮아진 '채무스와프'를 들고나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채무 3200억유로를 절반으로 깎아야 한다는 시리자의 선거 공약을 완전히 폐기해 버린 것이다.
대신 바루파키스는 ECB가 보유한 그리스의 부실 채권을 '명목성장연계채권(nominal economic growth)'과 '무기한채권(perpetual bonds)'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정부는 국제 채권단과 유럽 당국자들을 설득하는 데 번번히 실패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로존 회원국들은 본질적으로 그리스 채무 조정에 대해 입장이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프랑수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이날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항상 규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럽 경제 1, 2위국 정상 모두 그리스의 채무재조정 안에 반대한다는 뜻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날 성명을 내고 "부채 만기를 연장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구제금융 프로그램의 틀을 변화시키는 논의를 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