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 기자] 오순택(사진)은 제자들이 참 많이 따르는 배우다. 공연을 앞두고 충무아트홀 로비에서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제자들이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2005년 이후 9년 만에 무대에 서는 스승을 축하하기 위해 온 제자들이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다가오는 인파(!)들 속에 이야기는 별 수 없이 자주 중단됐다. “제자들한테 인기가 정말 많으시다”라고 말을 건네자 배우 오순택은 “얘들이 지금 바빠야 하는데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래요. 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 지..”라고 웃으며 답한다. 천상 스승의 얼굴이다.
배우 오순택은 대중들에게 헐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한국배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관객에게는 영화 <007 황금총의 사나이(1974)>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밖에 TV시리즈 <미녀삼총사(1976)>, <에어울프(1984)>, <뮬란(1998)>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헐리우드 영화계와 브로드웨이 연극계를 종횡무진하던 오순택은 15년 전 돌연 고국에 돌아왔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서울예대 등에서 연기를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영화와 연극에 간간이 얼굴을 내밀기도 했지만 명배우의 연기를 기다리는 관객 입장에서 보면 그 횟수는 턱없이 적었다.
자기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고, 어느덧 여든을 넘긴 노배우. 이 '하늘 같은 스승'을 다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순택의 복귀작은 연극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이하 미네티)>다. 제자 복 많은 배우답게 이번 연극은 스승을 향한 제자들의 헌정공연이라는 의미도 담고 잇다. 오순택의 첫 제자인 이윤택이 연출을 맡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오순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연희단거리패 간판 배우 김소희, 이승헌 등이 총출연한다. 오는 19일까지 충무아트홀 블랙에서 공연된다.
작품의 내용이 공교롭다. 세계적인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쓴 <미네티>는 사회에서 배척 당하고 잊혀진 노배우의 저항과 광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국내 초연작이며, 오순택은 미네티 역을 맡았다. 극중 노배우 미네티와 실제 관객의 눈 앞에서 존재하는 노배우 오순택, 여기에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리어왕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공연은 삶에 대한 사색의 결을 풍성하게 제공한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지금 난 리어를 공연하게 됩니다", "나는 잊혀지지 않습니다"와 같은 미네티의 대사가 노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끝없이 진동하는 연극이다. 미네티, 리어, 아니 배우 오순택과 이번 공연, 그리고 연기에 대해 나눈 대화를 여기에 옮긴다.
◇배우 오순택(사진=김나볏 기자)
-선생님께는 헐리우드에 진출한 첫 한국 배우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 다닙니다. 이런 얘기하면 지겨우시죠?
▲옛날엔 미국을 안 가서들 그랬지. 내가 우연히 거기 있었던 거죠.
-오늘은 헐리우드 이야기 말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배우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소회를 여쭙고 싶습니다.
▲기억을 좀 더듬어야 해요. 15년쯤 됐으니까. 한국에 돌아온 주 목적은 티칭(teaching)이었어요. 헐리우드에서는 할 만큼 했어. 내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 만한 대스타도 아니고, 더 이상은 인생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단체를 만들어 제작도 하고 티칭도 했으니까. 그땐 배우로 활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연기를 가르쳤어요.
한국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났다기보다는, 가끔 한국영화를 보면 아쉬운 점이 적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마 ‘한국에 와서 배우들과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너무 오래 전이라 생각이 잘 안 나요. 잊어버렸어(웃음).
-한국영화나 방송을 보실 때 아쉬웠던 점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영화에서 안 써주는데 이런 얘기까지 하면..(웃음) 영화계에서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아요. 알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웃음). 시장이 젊은 층 위주예요.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 없을 수도 있고..
한국 민족이 연기는 참 잘해요, 굿쟁이들인데.. (주저하며) 이 말 하면 가뜩이나 영화계에서 안 불러 주는데 더 안 불러 주겠지만.. 다 그런다는 것이 아니고, 애들이 너무 멋 부려요. 멋있으면 좋죠.
내가 걱정한다고 영화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삶이란 게 한 번씩 밖에 안 주어졌잖아요. 그런데 배우는 축복을 받아서 여러 삶을 살 수 있어요.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자각의식이 배우에게 없으면 연기가 들떠요.
항상 심각한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코미디를 하든, 즐길 수 있는 장르의 연기를 하든, 그 배우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삶이 주어졌기 때문에,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지. 관객이 ‘하하호호’하고 즐길 수 있겠지만 그럴 때에도 무의식적으로 ‘산다는 것이 뭔가’ 하고 어떤 순간에 대해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런 말을 하면 가뜩이나 날 안 써줄 텐데(웃음). ‘내가 살아 있어서 이 순간을 경험하는구나’ ‘연기자들 덕분에 정서의 폭, 삶에 대한 의식의 폭이 넓어지는 걸 느끼는구나’, 뭐 그런 게 있도록 연기를 해야지.
-여든이 넘으셨어요. 젊은 시절 헐리우드를 원없이 누비셨고요. 그런데도 여전히 기회에 대한 아쉬움이 있으신 건가요?
▲그렇죠. 헐리우드에서는 20~30대, 금발에 푸른 눈인 배우를 선호하잖아요. 거기서 내가 ‘왜 나를 주인공으로 안 써주냐’고 하는 건 내 고집밖에 안 돼요. 그런데, 한국은 다 나처럼 생겼잖아요(웃음).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연극도 해야 하지 않나 싶고. 근데 그건 내 사명이지, 엿장수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에요. 괜히 푸념하는 거예요(웃음).
-이번 작품 제안 받았을 때 첫 느낌은 어떠셨어요?
▲이건 정말 생각이 안 나. 이건 제작이나 연출하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지금 막연한 느낌으로는 그때 ‘당연히 내가 해야지’ 했어요(웃음). ‘오랜 만에 작품이 들어와서 고맙다, 반갑다’, 이런 생각은 안 한 것 같아. 그 생각을 했다면 현실적으로 ‘내가 이 역할을 한다면 스케줄이 어떻게 되고 얼마를 줄 거냐’, 이런 걸 물어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거 안 물어봤거든요. 연출하는 분이 또 제자이고 하니, ‘어, 그래. 하자’, 이렇게 된 거니까.
-그럼 대본을 보시고 난 후 첫 느낌을 여쭤볼게요.
▲작품에 대한 내 이미지는.. 한국의 부산, 여수, 목포.. 뭐,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여객선 말고 화물선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항구가 떠올랐어요. 그런데 그 항구가 다 시멘트로 뒤덮여 있는 느낌이었지. 이 사람은 그런 항구 부두에 서 있는 것 같다. 해가 떴는지 졌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을까 생각해보니.. 이 사람이 30년 동안 리어왕을 연기하고 싶어하고, 무대에 서고 싶어했지 않나.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구나’ 싶었어요. ‘우리 나라에도 그런 분이 계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30년을 기회를 기다려서 기회가 온 거지. 이런 분들은 무대에 설 때 얼마나 부담감이 생길까? 연기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야 해요. 자신이 생각하지 않은 순간에도 오감이 작동해 어떤 순간이 생기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연기를 안 하다가 연기를 하려면 참 힘들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나이가 80이고 한 40년 동안은 연기를 밥 먹듯이 했으니까 이런 사람을 생각할 때, ‘만일 기회가 있어 무대에 서게 되더라도 힘들 텐데, 차라리 하지 말고 꿈으로 간직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 ‘재현이 아닌, 표현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어요. 연기에 대한 이런 고민의 연장선 상에서 미네티라는 인물에 대한 이런 저런 이미지들이 생겨난 건 아닐까요?
▲연기라는 게 뭐냐, 생각해 보면.. 예전 선배님들은 ‘주어진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캐릭터가 돼라’,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당연히 캐릭터를 구축해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기는 ‘존재하기’이지, 캐릭터가 아니다’라는 생각..
그러면 존재함과 캐릭터는 어떻게 다른 거냐 하면.. 내가 배우가 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분이 기자로서 인터뷰를 하고 있지 않나요. 이것도 역할이에요. 또 부모님 앞에서는 딸 역할을 할 거고. 일생 동안 자라면서 각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캐릭터가 다 달라요. 그런데 지금 기자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연기를 한다는 것은 ‘캐릭터가 돼라’?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자의식이 뚜렷한 상태에서 캐릭터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지.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캐릭터가 되나요(웃음). ‘내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여건을 충족시킨다’는 거지 ‘캐릭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캐릭터를 만들면서 또 상황을 만들어줬지 않나. ‘그 상황에 정직하게, 충실하게 삶을 지속을 한다’, 그거지. 작가가 그려놓은 캐릭터의 ‘세계’를 구현해야지. 무엇이 된다? 이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 하면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자아가 있잖아요. 나는 오늘은 인터뷰이이고. 살아가면서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해요.
-이번 공연에서 미네티 역할의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대본 그대로 가나요?
▲거의 그대로 가요. 내가 보니까 이건 57페이지의 독백이에요.
-미네티 입장에서 보면 물리적으로 너무 힘든 대본 아닌가 싶습니다만.
▲속으로 생각했는데 ‘이거 괜히 한다고 그랬다’, 싶었어요(웃음).
-제자인 이윤택 연출가가 특별히 선생님께 연기에 대한 주문을 하기도 하나요?
▲이윤택은 주관이 뚜렷한 연출가예요. 방향이 틀리면 ‘아닙니다’ 라고 해요.
-연습 분위기는 어땠나요? 분량이 워낙 많으시니 실연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연기수업 같은 느낌일 것 같습니다.
▲맞아요. 사람들이 앉아서 구경하는 것 같아(웃음).
-제자들 중 스타 배우가 없다고 아까 농담처럼 말씀하셨는데요. 혹시 스승으로서 스타를 많이 배출하고 싶은 욕심이 있으신지요? 왜 스타 배우가 배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지도 궁금합니다.
▲가뜩이나 한국 영화계에서 나를 안 불러주는데 이런 얘기까지 하면 더..(웃음) 내가 영화나 TV를 많이 안 봐서 실수할 수도 있는데. 한국에서 지금 현재 로렌스 올리비에, 그레고리 팩 같은 존재감 있는 스타들이 나왔나요? 서슴없이 ‘스타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은 나는 안성기씨 밖에 생각이 안 나요. 그런데 내가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안성기 씨도 작품을 많이 안 해. 배우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한국 관객의 잘못인 것 같아요. 관객이 작품을 안 보신다든가, 아니면 주 관객층이 20대라든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20대 위주예요. 작품이 없고 역할이 없으니 어른들이 잘 안 나와요.
-작품이 다양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관객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문제예요. 30~40대 정도 되면 스태미너도 충분하고, 얼마든지 작업을 할 수 있는 분들인데 잘 안 보이잖아요. 국립극단의 책임자가 지금 김윤철 예술감독인데 그분이 이걸 읽을지도 모르지.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프로덕션을 왜 안하냐고 묻고 싶어요. 관객이 안 온다고? 관객이 모르니까 안 오지. 작품이 없어서 안 한다? 그럼 할 수 없지만.
아니면 아예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뮤지컬을 하든지 그래야 돈을 벌 거 아닌가(웃음). 근데 이윤택 연출가는 무슨 생각으로 날 불렀는지 모르겠다. 파산하고 싶은지..(웃음) 여러 가지 면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연극도 제작하려면 돈이 들텐데 말이지요.
-이 공연은 성인들이 함께 즐길만한 작품입니다. 공연을 보러 올 관객들에게 이 작품의 매력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관객이 오실 지 안 올 지 모르겠어요. 음, 영어로 말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든 연극이든 ‘엔터테인먼트’라고 부른다면 ‘엔터(enter)’는 ‘들어간다’, ‘테인먼트(tainment)’는 ‘다스린다’로 나눠볼 수 있어요. 그러면 ‘들어가서 마음을 다스린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웃음). 이 작품은 그런 공연이에요. 사실 젊은이들이 와서 재미있어 할 공연은 아니지 않나. 나이 드신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에게 자극될 부분이 작품 속에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는 되지 않을까요?
▲마지막 대사가 ‘사라지자’예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어떻게 보실 지 모르겠지만 내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게 있어요. 마지막에 이 한 캐릭터가 ‘사라지자’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인물인데, 이 사회가 그 분을 어떻게 대했기에 ‘사라지자’라고 말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랑 같이 80년을 산 사람이 ‘사라지자’ 라고 한다면, 그건 사라지는 사람 책임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을 ‘사라지자’ 라고 말하게 만드는 우리가 문제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사라지자’고 할까. 산다는 것도 하나의 업적이잖아요. 삶의 가치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다음 세대가 고비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게 크게 보면 인류의 발전인데. ‘사라지자’는 말은 사실 섬찟하죠. 그 대사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울림이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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