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충희기자] 유럽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가장 수혜를 입을 것으로 기대됐던 자동차산업이 오히려 무역수지 악화를 키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1년 7월 한·EU FTA 발효 이후 만 3년 동안 유럽으로의 자동차 수출은 정체현상을 빚은 반면, 유럽산 자동차는 국내 시장을 활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0일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국내 완성차 5사의 유럽연합(EU)으로의 수출은 FTA를 체결한 지난 2011년 연간 42만7000여대에서 2012년 39만9000여대, 2013년 40만7000여대를 기록해 3년 동안 제자리 걸음을 보였다. 올 들어 5월까지 유럽으로의 수출량은 16만700여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18만4000여대) 대비 13% 감소했다. 정체를 넘어 사실상의 퇴보로, 위기다.
반면 유럽산 자동차들의 국내시장 잠식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2011년 7만7800여대를 기록했던 유럽 브랜드의 국내 자동차 등록대수는 2012년 9만7000여대, 지난해 12만3000여대로 연평균 증가율이 25%를 웃돌았다.
올해 들어 성장세는 더 탄력이 붙었다. 5월까지 등록된 유럽 브랜드 자동차는 총 6만2000여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약 30% 증가했다. 유럽 브랜드 자동차 중 일부가 미국 등에서 생산돼 수입되고 있지만 80%가 넘는 차종이 유럽 현지에서 수입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장기 불황과 세월호 참사 등의 여파로 소비심리가 극히 위축된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의 고공행진이다.
유럽산 자동차들이 국내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전체 수입차의 국내시장 점유율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올 들어 5월까지 누적 점유율은 13.79%로, 이중 유럽 브랜드가 전체 수입차 중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81.3%를 기록했다. 명차들의 본거지인 유럽산에 대한 선호와 높은 브랜드 가치, 여기에다 한·EU FTA로 인한 가격 경쟁력까지 누리게 되면서 더 이상 수입차는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대중화의 본격화다.
◇그래프=뉴스토마토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된 국내 자동차 업계의 비통함은 크다. 당초 정부가 공언했던 FTA 효과는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정부는 유럽연합과 FTA 협상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상대적인 우위 품목으로 자동차산업을, 열세 품목으로 농수산물을 꼽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012년 7월 내놓은 '한·EU FTA' 설명자료에서 "우리의 최대 수출품목이자 EU측의 최대 민감품목인 승용차 관련...(중략)...미국이 승용차 관세(2.5%)를 즉시 철폐키로 한 것보다 더 큰 개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소개한 뒤 농산물 양허기준과 관련해서는 "경쟁력 차이를 감안해 비대칭적인 개방 수준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한국산 자동차의 관세율을 5년내 모두 없애는 조건(기존 10%)으로 내준 유럽산 돼지고기와 낙농제품들에 대한 관세 철폐를 일정 부분 내줄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자동차산업에서 거둬들일 이익이 막대해, 주고 받는 국가 간 무역협정 원칙을 고려할 때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부연도 뒤따랐다.
3년의 실상은 달랐다. 상대적 우위를 보일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자동차산업 대결에서도 완패하며 잃기만 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실제 처참히 무너진 현실은 당시 전망을 장밋빛으로 치부하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기술 및 브랜드 격차 등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취약점만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는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타이어 등의 고무제품 등은 2년차에 수출이 감소했으나 3년차에 증가로 전환했다"며 "FTA 3년차에 유럽 재정위기 여파, 유로화 약세, EU로의 수입선 전환 등으로 적자규모는 확대됐다"고 말했다. 유럽의 급작스런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당초 예상이 빗나갔다는 주장이다.
◇국내 수입차시장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BMW 5시리즈.(사진=BMW)
자동차 크기별 수출입 흐름 역시 이러한 '참패'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소형차를 선호하는 유럽 소비자들의 성향에 맞춰 대부분 중소형차 수출에 그치고 있는 반면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수입차는 대부분 독일 프리미엄 3사(BMW·벤츠·아우디)의 고가 라인업으로 구성됐다.
올 들어 5월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수입차 중 6000만원대를 훌쩍 넘는 BMW 5시리즈, 벤츠 E클래스 이상급의 라인업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폭스바겐을 필두로 디젤엔진을 장착한 실속형에서도 무섭게 국내시장을 잠식하며 시장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한·EU FTA 4년차를 맞아 전문가들이 정부의 자동차 FTA 협상을 실패작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자동차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기아차가 2000년대 후반 유럽 현지에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으로의 완성차 수출량이 정체 현상을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면서 "프리미엄 전략이 통하는 독일산 브랜드와의 수익성 대결에서도 게임이 되지 않는데, 양쪽 시장에서 동일하게 5년 내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는 것은 협상에 돌입하기 전 제대로 된 분석이 없었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현대·기아차가 유럽에서 브랜드의 한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이, BMW와 벤츠 등 고가의 독일 브랜드 자동차들은 국내에서 관세가 낮아지고 있음(1500cc이상 8%→0%)에도 오히려 가격은 올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고가의 정책을 유지함과 동시에 한국시장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BMW 5시리즈는 2011년형이 5990만원~1억1800만원에서 2014년형 6290만원~1억2890만원으로, 2011년형 벤츠 E클래스는 5850만원~9780만원에서 2014년형 6030만원~9440만원으로 가격이 올랐다. 각 업체마다 공개를 기피하는 수입원가를 판매가격의 절반수준으로 따져봤을 때, 관세 철폐 효과로 양 라인업에서 챙기는 이득은 대당 300만원~500만원에 달한다.
박은석 한국수입자동차협회 차장은 "1500cc이상 유럽산 차종의 관세가 0%로 철폐되면 수입차 업체들의 판매량은 가격인하 효과와 기타 여력이 증가하면서 앞으로 더욱 긍정적일 전망"이라며 "관세 인하 효과로 얻는 이득은 브랜드별로 달라 통합 산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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