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독립 다큐영화로는 드물게 5000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탐욕의 제국>. 다큐영화계 신성으로 떠오른 홍리경 감독은 삼성 반도체 피해자 문제라는 무거운 주제를 선택해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최근 차기작을 구상하며 휴식 중인 홍 감독을 지난 19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탐욕의 제국>은 자극적인 제목과 달리 오히려 담담하고 밝은 영화였다. 앞서 개봉한 <또 하나의 약속>과 달리 직간접적으로 삼성을 겨냥해 비판적 언사를 쏟아내기 보다는 피해자들의 일상과 삶을 소소하게 나열하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표현 그대로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같은 감독의 의도가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관객과의 공감대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인터뷰에서 홍 감독은 "삼성전자를 보고 다큐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결국엔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을 갖게 됐다"며 "다만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전자쓰레기' 문제 등을 다뤄볼 의향이 있다는 점도 시사했다.
최근 진행 중인 삼성전자와 반도체 피해자 및 반올림과의 협상에 대해서는 아직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기업이 7년 만에 발표한 사과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만 그게 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좀 더 지켜보겠다는 얘기다. 다음은 홍리경 감독의 인터뷰 전문이다.
◇홍리경 감독.(사진=황민규 기자)
-<탐욕의 제국> 상영이 끝난 이후 어떻게 지냈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쉬고 있다. 벌써부터 지겨워지고 있다. 새로운 작품도 구상하고 있다. 아직 고민 중인데, <탐욕의 제국> 끝부분에서 나온 '전자쓰레기'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해볼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작품을 해볼지 모르겠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삼성전자와 반도체 피해자 사이 공방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삼성전자가 전향적으로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발표했는데, 지금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나.
▲삼성전자 측에서 공식적으로 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다시 교섭이 진행됐다. 이후 과정에 대해서는 주로 기사를 통해 접했다. 나중에 활동가들한테 상황을 듣기도 했다. 활동가들은 최근에도 한번 만났는데, 가족 분들과 직접 연락하고 지내진 않는다.
7년이 넘도록 싸우는 과정에서 공식적인 회사측 사과의 말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워낙 뒤에서 금전적으로 회유를 시도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공식적 사과를 일단 반기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를 다 해결하진 않는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맞다. 지켜보자는 단계 같다.
-올해의 경우 비슷한 시기에 삼성 반도체 직업병과 관련한 영화가 두 편이나 개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전자는 전향적으로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했다. 공교로운 일 아닌가.
▲영화가 미친 영향은 없는 것 같다. 기업 이미지 쇄신 차원의 행동 아닐까 싶지만 그들의 속내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동안 아무 대답 없는 회사가 어느 정도 산업재해에 대해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관객과 쉽게 만날 수 있거나 그들의 삶과 생각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진 않는 것 같다. 다만 누군가는 모르고 넘어갔을 삶에 대해서 기억해달라는 정도다.
내 영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다큐멘터리도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발휘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작은 목소리들이 쌓이고 쌓여서 바뀌는 것이다. 사실 하나의 작품이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는 것도 오히려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많이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화가 개봉하는 것 자체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개봉 이후에도 많은 관객이 보리라곤 생각 안했다. 관객이 5000명 정도 들었는데 독립 다큐치고는 꽤 많은 숫자다.
◇영화 <탐욕의 제국> 포스터.(사진=네이버)
-작품의 완성도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주자면.
▲누가 자기 작품에 대해 완성도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작업하면서 헤매는 것도 많았고, 작업 방향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했다. 너무 큰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떻게 이 이야기들을 두 시간짜리 영화에 다 담을까 하는 고민도 컸다. 물론 고민한 만큼 영화의 완성도로 이어지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삼성을 다큐멘터리의 주제로 삼기엔 민감한 부분이 많았을 텐데 부담은 없었나.
▲처음 '탐욕의 제국'을 시작하게 된 건 내가 속해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의 선배가 제안하면서부터다. 근데 제안을 하면서 했던 말씀이 "혹시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 중에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 없냐"는 질문이었다. 만약 그런 경우 굉장히 곤란할 수도 있다고 하셔서 그때 '사람들이 삼성에 대해서 보통 그렇게 생각을 하는구나'하고 느꼈다.
혹시 나도 미행이나 도청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같은 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반도체 공장) 피해 당사자나 가족들을 만나면서 그런 위험보다는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싸움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커졌다.
-영화 출연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탐욕의 제국>에 등장한 피해자나 활동가분들은 보통 신문 지면이나 TV에서 종종 봤던 사람들이다. 처음 촬영을 갔을 때부터 이미 미디어에 노출이 많이 돼 있는 상태였다.
다만 그분들 말고 현재 투병 중이신, 혹은 밖으로 나서서 싸우지 못하는 분들의 목소리도 담고 싶었다. 직접 나서서 싸우지 못하고, 산업재해를 주장하지 못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이분들의 허락을 받는 게 어려웠다. 자신을 대중 앞에 꺼내놓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누가 자신의 불행을 남한테 드러내는 걸 좋아하겠는가.
-다큐영화 작업자로서 민간기업, 그것도 공정이 모두 비공개로 감춰진 반도체 기업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산업재해를 다룬 영화기 때문에 그들이 일하는 현장을 들어가 볼 수 없고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치 아는 것처럼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 속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부분을 많이 강조할 수 없었다.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소소한 삶, 일, 기숙사 등. 이걸 영화에 많이 담고 싶었는데 공간 자체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어서 한계가 컸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산업재해 공방에 대한 기술적 접근을 할 생각이었나.
▲그렇다. 처음 다큐를 시작할 때는 피해자들이 진행하고 있는 산재 인정 행정소송이 영화의 큰 줄기 중 하나였다. 소송을 다루다보면 (반도체 직업병에 대한) 사실관계가 주된 이야기가 될테니.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이미지화하는데 한계가 컸다. 우선 법정을 찍을 수도 없었고 공장을 찍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찍을 수 없는 부분을 포기하고, 찍을 수 있는 것을 따라갔다. 그러다보니 살아있는 사람들, 투병하는 사람들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됐다.
(반도체 공장에서 난치병을 유발한다는) 입증이나 이에 대한 법정 공방 자체가 사실관계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산업재해 피해자들이 어떤 입장과 근거로 주장하는지, 삼성전자와 정부의 입장은 어떤지를 담아내면 (결과적으로) 피해자들에게 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들이 일하는 현장(반도체 공장)을 잘 모른다. 일반인들은 저게 왜 산재인지 잘 모른다. '자신이 병에 걸렸는데 왜 기업을 걸고넘어지느냐'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영화 끝부분에 나왔던 고등학교 졸업식 이미지도 그 '인식'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가.
▲학생들이 (삼성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으면 했다. 피해자들이 말하기를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해 여러 회사에 원서를 넣는데 거기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대부분 모르고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삼성'이란 기업을 보고 원서를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급여 차이도 많이 난다. 그 친구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할 지 짐작을 하게 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떤 노동자는 아프고, 어떤 사람은 멀쩡하기 때문에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린 고졸 여사원뿐만 아니라,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엔지니어나 사원들도 자신이 위험물질을 다룬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위험 자체가 일상화되고 삶이 돼 버린다. 크게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공장 엔지니어들도 (자신들이 다루는 물질이) 위험한 물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내가 아프게 된다고 해도 이것을 산업재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만큼의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만이 해결방법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잘 알든, 잘 모르든 안전한 현장이어야 한다. 그들의 무지가 그들의 병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컨테이너 박스와 터미널 등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어떤 의미인가.
▲우선은 내가 접근할 수 있는 현장의 한계였다. 공장 안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다른 의미로는 산업 현장에서 작은 부품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을 은유적 이미지로 대신 표현하고 싶었다. 거대한 터미널 안에 무수히 많은 박스들이 쌓여있고 그걸 운반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멀리서 보고 있으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공간이 개인이 사라진 공간으로 보인다. 반도체도 우리가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그들이 만든 작은 부품 하나가 전자제품에 무수히 쓰이고 있는데도 우리가 모르는 삶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의도였다.
-엔딩의 전자쓰레기장 이미지도 <탐욕의 제국>에 대한 은유적 표현인 것 같다. 어떻게 촬영한 것인가, 향후 이 문제를 작품으로 할 생각도 있나.
▲직접 찍은 건 아니다. 전자쓰레기를 처리하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한 마을을 담아낸 영상인데 (휴대폰, TV, 냉장고 등의) 제품들이 만들어질 때 야기했던 문제가 쓰이고 버려져서도 똑같은 문제들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산업재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안에서 사람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전자제품이 버려져서까지도 사람, 환경에 문제를 야기한다는 걸 언급하고 싶었다.
중국에 세계 최대의 전자쓰레기처리장이 있다. 조연출, 활동가가 그곳을 촬영하러 갔는데, 워낙 감시가 심해서 촬영을 못하고 돌아왔다. 대신 그린피스에서 촬영한 소스가 있어서 삽입했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2년간 현장에서 감독이 지켜본 삼성은 어떤 존재인가.
▲오히려 삼성에만 갇힌 시각을 벗어나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삼성 반도체 공장 직업병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이런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몸집이 다를 뿐 삼성과 같은 기업은 우리나라, 전 세계 어느 곳에든지 있다. 노동자가 기계나 부품처럼 살아가는 삶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가 사회를 다 바꿔버릴 수는 없으니 작은 것부터,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현장에서 만난 하청업체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삼성 반도체 공장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업 현장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시선에서) 삼성은 어떠한 안전기준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기업이었다. 그렇게 덩치가 크고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데도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편법을 사용하는 기업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바꿔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독 홍리경에게 <탐욕의 제국>은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완성도를 떠나서 소재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릴 만한 주제의 영화였다. 그래서 관심을 받았다. 작업자로서는 많이 부담스럽고 무거웠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구나'하는 위안이 든다.
2년간 현장에 있었지만 활동가들처럼 피해자 가족들 사이에 섞여 있었던 건 아니다. 카메라를 들고, 다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감히 활동을 했다고는 말하진 못하겠다. 오히려 정당한 것을 위해서 싸운다는 생각보다는 현장에서 친해진 사람들,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과의 의리, 정 같은 감정들이 컸다. 이들이 곤란한 상황, 고통스럽거나 아파하는 상황에서 친구나 이웃으로서 느끼는 감정이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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