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1930년대 미국 보험사 직원인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보험사고와 관련된 통계를 분석하다가 하나의 법칙을 발견했다. 사고는 어느 순간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소하지만 작은 사고가 반복되다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사고들을 무심코 방치하면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게 바로 하인리히 법칙이다.
하인리히 법칙은 원자력발전소 비리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올해 상반기 원전 비리와 대형 원전 가동 정지 등의 조짐은 이미 과거부터 예견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 원자력안전위원회 등에 따르면 원전과 관계된 정부와 공공기관은 그야말로 비리와 부정부패의 백화점을 방불케 했다.
5일 원안위 자료를 보면 한수원 관련 비리 중 향응·금품 수수, 골프 접대는 기본이고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납품계약 관련 청탁·알선 ▲인사청탁 ▲납품가격 담합 등 기자재 관련 비리가 비일비재했다. 또 한수원은 지난 2011년부터 최근까지 하도급 업체에 1600회가 넘는 외부강의를 나가 4억원이 넘는 강의료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이후 한국수력원자력의 원자력발전소 관련 비리·부정부패 현황(자료=원자력안전위원회)
그 밖에 법인카드를 무단 사용하고 근무지 이탈한 직원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마약을 복용한 직원도 있었다. 이렇게 2001년부터 한수원에서 비리와 부정부패로 기소된 직원은 45명이며 금품 수수액만 46억원에 달했다. 특히 한수원 송모 부장은
현대중공업(009540)으로부터 원전 부품 납품건으로 무려 10억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이채익 의원은 "올해 원전 비리와 관련해 부산 동부지청 '원전비리 수사단' 기소 액수를 기준으로 한수원 직원들의 금품 수수액을 계산하면 횡령 사건 34억여원과 원전 케이블 피해금액 59억원 등 총 139억여원"이라며 "직원 1인당 평균 3억원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원전비리 피해액 얼마? 전력 대체비용으로 국민 혈세 3조 낭비
그렇다면 원전 비리에 따른 피해액은 구체적으로 얼마나될까. 앞서 이채익 의원이 원전 수사단의 기소금액을 통해 피해액을 계산한 사례에서 보듯 원전 비리로 인한 피해 규모는 애초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부정부패가 오랜 시간 발생한데다 불량부품 사용과 담합 등이 유·무형에 걸쳐 다양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원전 비리의 피해 규모를 ▲원전이 고장 났거나 가동을 멈췄을 경우 이를 복구하기 위해 투입한 예산 ▲올여름 원전이 운전을 정지하는 바람에 생긴 전력공백을 메우기 위한 정부 예산 ▲원전 비리 등으로 국민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과 이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 등으로 나눠서 추산해봤다.
우선 한수원 자료를 바탕으로 확인한 결과 원전 고장의 원인은 설계미흡, 제작·시공·정비불량, 인적오류, 자연열화 등으로 2004년부터 올해까지의 고장 건수는 총 80건이었다. 이 중 올해 원전 정지는 지난 7월 원자로 복수기 결함을 일으킨 한울 원전5호기 등 4건이며 이에 따른 원전 수선유지비는 기타 시설보수비 포함 총 5322억원이나 됐다.
◇최근 3년간 원자력발전소 수선유지비 집행실적(단위: 억원)(자료=한국수력원자력)
특히 2004년부터의 원전 고장 건수 중 제작불량과 인적오류가 각각 전체의 30%와 18.8%로 다수를 차지했고, 수선유지비도 2011년부터 해마다 증가세를 나타냈다. 이는 원전 비리에 따른 불량 부품 사용 등 장비 결함과 고장이 그만큼 많다는 뜻으로 최근 3년 동안 쓴 수선유지비만 무려 2조에 육박한다.
올여름은 이상기온 영향으로 예년보다 빠른 6월부터 무더위가 찾아왔고 냉방수요가 급증해 일찌감치 전력난이 대두됐다. 그러나 이 시기 원전 비리로 국내 원전 23기 중 10기가 가동을 멈춰 1000만㎾에 달하는 전력공백이 발생했고 정부는 천문학적 비용까지 감수하며 민간 발전소와 비상용 발전기까지 급하게 가동해야 했다.
◇원전 비리와 고장 여파로 원자력발전소가 10기나 가동을 멈췄던 7월18일이 원전 가동현황(上)과 원전 가동이 정상화된 11월5월의 운전 현황(下)(자료=한국수력원자력)
올해 전력난이 가장 심했던 때는 8월12일부터 14일까지로,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300만㎾의 예비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자가발전기 가동, 주간 예고제 시행 등에 하루에만 42억원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6월부터 8월까지 비용으로 계산하면 전력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쏟은 돈만 두달간 무려 2000억원이나 된다.
여기에 한수원의 전기판매 손실액과 액화천연가스(LNG) 등 대체에너지 구입비를 고려하면 올해 상반기 정부가 입은 손실은 2조6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더군다나 이 비용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충당했기 때문에 결국 원전 비리로 국민 혈세만 3조원이나 낭비된 셈이다.
이에 대해 에너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전력산업기반기금은 기본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생산 지원과 전력수요 관리, 전기안전 조사·연구, 홍보사업 등 공익 목적으로 쓰는 것"이라며 "전력수급 관리에 비용지출이 큰 만큼 장기적으로 전력산업 분야에서 재정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원전비리와 사고의 사회경제적 피해는 어림잡아 수십조원
원전 비리의 사회경제적 피해는 구체적 추산이 불가능하다. 정부 지출은 물론 원전에 대한 사회적 신뢰 저하,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시민들의 심리적 부담, 원전기술에 대한 국가 신용 하락 등은 당장 구체적인 액수로 계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전문가들은 사회경제적 피해 규모를 최소한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에경원 관계자는 "일본의 아베 정권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피해보상과 복구 비용으로 5년 동안 19조엔(원화 200조)의 예산을 편성했다"며 "우리나라 원전 비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보다 정도가 약하지만 사회경제적 비용이 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설명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상황(사진=뉴스토마토)
그러나 산업부와 한수원 등은 불량 케이블을 납품한
JS전선(005560) 등을 상대로 1200억원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 외에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노영민 의원은 "한수원의 손해배상 청구는 케이블 교체비용에만 국한됐을 뿐 전력판매 손실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원전 비리에 따른 정부 지출을 상쇄하고 사회경제적 비용을 충당할 방안을 마련하는 동시에 불량부품 납품 업체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이런 점들을 고려한 액수를 물려야 한다는 것. 노영민 의원은 "한수원은 추가적으로 2조8000억원을 더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우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정부는 원전사고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100% 완벽한 안전 보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우리나라는 원전 사업자의 배상책임을 5000억원 유한책임으로 규정하고 500억원의 손해배상조치만 의무화했을 뿐 추가적인 비용적립이나 대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장우석 연구위원은 이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원전 해체와 환경복구 등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고 구체적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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