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생육신' 김시습에겐 후손이 있을까?
2026-06-25 06:00:00 2026-06-25 06:00:00
헌법재판소는 24일 과거사 사건에 관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이의 자격을 '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로 한정한 형사소송법 조항이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가족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건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죽어 미처 결혼이나 출산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직계가족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태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획일적 기준으로 가족의 범위를 적용하는 건 고인의 명예를 회복할 최소한의 권리마저 침해한다는 게 헌재의 결론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헌법소원을 낸 청구인들은 6·25 전쟁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제수와 조카들이었습니다. 현행법의 장벽에 가로막혔던 이들은 헌재의 결정으로 비로소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길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헌재의 결정을 보면서 역사는 끊임없이 진일보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과거로부터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에 관한 고민은 비단 현대사에만 국한됐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선 초 '생육신'이었던 김시습(1435년 ~ 1493년)의 사례는 국가적 비극 속에서 가족의 범위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에 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김시습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유명했습니다. 5살 때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어 비단 50필을 상으로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가 채 스무살이 되기도 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하는 계유정난이 벌어집니다. 올해 초 개봉해 큰 화제를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등장한 바로 그 사건입니다. 
 
신하들이 왕을 시해한 일에 큰 충격을 받은 김시습은 보던 책을 모두 불사른 뒤 삭발하고 승려로 출가, 전국을 떠돌게 됩니다. 김시습은 단종에 대한 지조를 지켰지만, 평생 방랑한 탓에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후기 임금인 정조가 생육신인 김시습과 남효온, 성담수 등에 관해 언급하면서 "세 사람은 자손이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새로운 제국의 문을 열며 과거 충신들의 정신을 잇고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후손이 끊긴 충신들의 제사를 잇도록 문중에서 양자를 들이라"는 봉사령(奉祀令)을 내립니다. 이에 따라 문중의 결의를 통해 1920년, 김시습의 사후 양자가 입적됩니다. 김시습은 직계 후손이 없었기에 무려 11촌의 후손을 찾아 대를 이은 겁이다. 김시습 사후 400년이 지나서야 국가의 명으로 먼 친족이 공식적인 '후손'으로 인정받은 셈입니다.
 
김시습에 대한 봉사령과 오늘날 헌재 결정은 서로 다른 시대에 내려졌지만, 공통의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국가적 폭력과 변란으로 인해 단절된 삶과 가계를 어떻게 복원하고, 그 명예 회복의 과제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만약 김시습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재심이 오늘날 필요했다면, 현행 형사소송법 체계에서는 11촌 후손이나 문중은 청구권조차 갖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할 게 자명합니다.

헌재의 이번 헌법불합치 결정은 단순한 법 조항을 수정하는 걸 넘어, 역사적 비극으로 해체된 가족을 다시 연결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골령골 희생자의 조카와 김시습의 11촌처럼, 남겨진 이들이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길을 넓힌다는 점에서, 헌재의 판단은 법치주의가 한 걸음 더 진전한 사례로 평가될 겁니다. 

최병호 뉴스토마토 공동체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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