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수현기자] 국민적 상식에 반하는 내용들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RO 회합' 녹취록에 대한 구체적 해명은 내놓지 못한 채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의혹은 국가정보원의 프락치 공작"이라 주장하는 통합진보당을 향한 시선이 차갑다.
왜곡·날조의 근거를 대지는 못하면서 '국정원의 프락치 공작'이라는 점만 부각시키는 모습은, 마치 과거 초원복집 사건과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 부정을 자행한 당사자들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고 했던 시도를 연상케 하고 있다.
비록 이번 사태가 대선 개입 문제로 존폐의 기로에 선 국정원의 국면 전환용 카드라는 의심이 강하지만 제기된 의혹들이 분단된 현실에서 반드시 규명될 필요가 있음에도 진보당은 제대로된 해명 없이 녹취록 조작 문제만 부각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지적이다.
홍성규 대변인은 3일 "더 심각한 문제는 국정원 스스로도 자인한 '정당사찰' 문제"라면서 "명백한 국내 정치 개입이자 이 과정에서 '프락치 매수공작'까지 했음이 확인됐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국정원의 정당사찰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라고 주장했다.
여론의 공분을 사고 있는 이 의원 등의 발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국정원이 입수한 녹취록은 프락치를 동원한 공작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런데 이는 1992년 초원복집에 모여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방식의 관권선거를 기획했던 김기춘 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당시 정부와 여당 측 인사들이 모의가 들통 나자 불법 도청을 문제 삼았던 물타기 전략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제14대 대선을 앞두고 터진 초원복집 사건은 이와 같은 대응이 주효해 관권선거 모의를 폭로했던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가 PK 민심의 역풍을 맞았고,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또 2005년 삼성 엑스파일 사건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삼성그룹 이학수 당시 부회장에게 집권 여당 대선 후보 및 검사들에게 제공한 대선자금과 뇌물에 관한 대화를 전직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도청해 세상에 알려진 일로, 사안의 본질이 뒤바뀌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정경유착과 김영삼 정부의 불법 도청 문제가 대두됐는데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홍 회장과 이 부회장 등의 뇌물 공여 혐의는 공소시효 완료로 무혐의 결정을 받았다. 반면에 떡값검사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됐다.
국정원의 내란 카드에 직격탄을 맞은 진보당의 대처가 평소 비판해 마지않던 새누리당 정권 및 재벌의 그것과 닮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독수독과(毒樹毒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에도 상황이 진보당의 바람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설득력 있는 대응책을 취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보고된 2일 이석기 의원은 여야 의원들에게 돌린 친전에서 "저의 진심이 '총'이라는 단어 하나로 전체 취지와 맥락은 간데없고 '내란 음모'로 낙인찍혀 버렸다"고 항변했다.
이 의원은 친전을 통해 녹취록에 담긴 내용이 왜곡과 날조로 점철된 짜집기임을 강조한 것이지만 이는 도리어 당시 모임에서 "총"과 같은 국회의원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사실이 있음을 시인한 꼴이 됐다. "전체가 날조"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던 초기 입장과는 달라진 태도에 거짓 해명 논란만 불거졌다.
이정희 대표가 이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에 반대하는 단식투쟁에 돌입할 정도로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는 진보당이지만, 세간이 궁금해하는 내란 혐의에 대해선 "왜곡·날조·국정원의 프락치 공작"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사건으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묻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서도 민주당과 정의당이 진보당과 선을 긋고, 야당 지지성향의 시민들까지도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는 진보당에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이유다.
이 의원 체포동의안은 4일 또는 5일 열릴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무난히 통과될 전망이다. 국정원 발(發) 프락치 공작의 유탄을 맞았더라도 원내 제3당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진보당의 후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진=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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