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6부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화자는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기나긴 상실과 망각의 시간을 통과한다. 알베르틴을 소유하고 감시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시간과 물질적 헌신, 신경증적 에너지는 그녀의 죽음과 함께 회수 불가능한 허무로 돌아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망각의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 보였을 무렵 화자는 할머니를 추모하는 검은 상복 베일을 쓴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동경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난다. 찬란한 햇살이 대운하 위에 부서지는 그곳에서,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어둡고 서늘한 산마르코 대성당의 세례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불균질한 대리석과 유리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세례당 바닥을 밟으며, 화자는 비잔틴 모자이크와 세례반을 응시한다. 요르단강에서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는 세례 요한의 모자이크 앞에서 화자가 노트에 뭔가를 적으며 오래 머물자, 세례당의 얼음 같은 냉기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려는 어머니가 그의 어깨에 따뜻한 숄을 걸쳐 준다. 이어 방문한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비토레 카르파초의 회화 〈그라도 총대주교의 구마 기적〉을 마주한 순간, 그림 속 귀족 청년의 망토가 화자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른다. 디자이너 마리아노 포르투니가 영감을 얻은 원형이자, 알베르틴이 떠나기 전날 걸쳤던 바로 그 포르투니 외투였기 때문이다.
잊었다고 믿었던 고통과 욕망의 잔해가 되살아나 화자를 괴롭힌다. 급기야 화자는 기차역으로 향하는 어머니를 따라나서지 않고 홀로 베네치아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미 끝나버린 과거에 발목이 잡혀 떠나야 할 순간에 발을 떼지 못하는 일종의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다. 어머니가 떠난 호텔에서 홀로 테라스에 앉아 〈오 솔레 미오〉를 듣다가 화자는, 기차 출발 직전에야 마비에서 깨어나 필사적으로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과거에 쏟아부은 감정과 욕망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떠나야 할 시점에 머뭇거리는 이 풍경은, 이미 투입된 자본과 위신에 묶여 실패한 사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매몰 비용 오류'와 철수의 지연을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 소설의 화자는 그나마 결정적 좌초는 모면했지만, 기업의 역사에서 미적거리다 무너지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감정의 유폐와 매몰 비용 오류
기업 의사결정에서 치명적인 함정 중 하나는 이미 엎질러진 물에 미래의 자원을 계속 쏟아붓는 행위다. 경제학 원칙상 합리적 의사결정은 미래에 발생할 추가 비용(한계비용)과 추가 편익(한계편익)만을 비교해야 하며, 이미 지출되어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Sunk Cost)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과 조직은 이 합리성의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베르스키의 '프로스펙트 이론(Prospect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동일한 크기의 손실에 이익보다 더 고통을 느낀다. 민감도의 크기는 상황과 측정 방식에 따라 달라지지만, 고통의 크기를 2배 이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여기에 리처드 탈러의 '심리적 회계(Mental Accounting)'가 결합하면 사태가 더 악화한다. 마음속 프로젝트 계좌를 '최종 적자'로 마감하는 고통을 피하려다 보니, 실패가 명백한 상황에서도 추가 자본을 베팅하는 비합리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조직행동학자 배리 스토는 이것을 두고 초기 결정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투자를 늘리는 자기정당화의 덫, 곧 '몰입의 상승(Escalation of Commitment)'이라 명명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합작 개발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Concorde)'는 그 전형이다. 개발 초기부터 예산 폭증과 소음 문제, 100석 규모의 협소한 경제성, 오일쇼크에 따른 연료비 급등으로 민항사들의 주문 취소가 잇따랐으나, 양국은 그때까지 쏟아부은 자금과 국가적 위신이 아까워 사업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막대한 초기 개발비를 끝내 회수하지 못한 채 납세자의 부담으로 상각 처리해야 했고, 콩코드는 2003년 퇴역하며 '콩코드 오류'라는 오명을 남겼다.
1975년 엔지니어 스티브 새슨을 통해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코닥(Kodak) 역시 당시 미국 내수 필름 시장의 90%에 시장점유율과 화학 공장이라는 매몰 자산에 결박되어, 스스로 발명한 미래를 서랍 속에 가두었다가 몰락을 자초했다.
'좀비 프로젝트'와 헤일로 효과
왜 엘리트 경영자들과 기업 전략가들이 이 자명한 함정에 빠질까. 여기엔 인지적 오류를 넘어선 조직 심리와 권력 역학이 작동한다. 비즈니스 세계는 흔히 '헤일로 효과(Halo Effect, 후광 효과)'의 지배를 받는다. 과거의 거대한 성공이 리더에게 후광을 드리워 현재의 전략 또한 무조건 옳을 것이라는 맹신을 강요하고, 현장의 경고음을 불순한 잡음으로 묵살하게 만든다.
과거 모바일 제국 노키아(Nokia)의 추락은 어리석은 집착과 조직적 침묵이 결합한 결과다. 2007년 아이폰 출시와 2008년 안드로이드폰 상용화로 산업 패러다임이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급변할 때, 세계 휴대폰 시장의 약 40%를 장악했던 노키아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입한 자체 운영체제(OS) '심비안'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엔지니어들은 심비안의 복잡한 소스 코드가 터치스크린과 앱 생태계에 부적합함을 알았으나, 성공 신화를 이끈 경영진의 후광 앞에서 직언하지 못한 채 낡은 코드 보수에 자원을 낭비했다. 이처럼 리더의 사내 입지와 대리인 문제가 결합하면, 실패한 사업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좀비 프로젝트'로 둔갑한다.
실패 인정을 경력의 오점으로 여기는 리더가 조직 자원으로 실패한 사업의 산소호흡기를 유지하는 동안, 실무자들은 지표를 마사지하며 장밋빛 보고서를 올린다. 실패를 인정할 용기의 결핍은 조직 전체를 침몰로 몰아넣는데, 노키아만큼 극명한 사례가 없다.
손절의 미학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진입 전략 못지않게 과감한 철수(Exit) 전략이 필수적이다. 피터 드러커는 경영자가 정기적으로 던져야 할 핵심 질문으로 "만약 우리가 아직 이 사업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오늘 이 사업에 다시 뛰어들 것인가?"를 꼽으며, 답이 '아니오'라면 그 사업에서 빠져 나오라며 '체계적 폐기(Systematic Abandonment)'를 강조했다. 전략경영의 대가 마이클 포터 역시 특수화한 설비 자산, 고정 청산 비용, 사업 간 전략적 상호의존성, 경영자의 감정적 애착, 사회 및 정부의 장벽을 5대 퇴거(Divest) 장벽으로 지목했다. 위대한 리더십은 이 장벽을 돌파해 회생 불가능한 유산에서 발을 빼고 미래 핵심 역량으로 자원을 재배치하는 결단력에서 나온다.
1985년 인텔(Intel)의 전략적 철수 결단은 노키아의 정반대 사례다. 기업의 모태였던 D램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공세에 밀려 막대한 적자를 내던 시절, 창업자 고든 무어와 사장 앤디 그로브는 운명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로브가 "만약 우리가 쫓겨나고 새 최고경영자(CEO)가 온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묻자 무어는 "당연히 D램에서 철수할 것"이라 답했다. 그로브는 즉각 "그렇다면 왜 우리가 지금 저 문밖으로 나갔다가 새 CEO처럼 다시 들어와 그 일을 직접 하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인텔은 창립 신화가 묻힌 메모리 사업의 비중을 줄이고 마이크로프로세서(CPU)로 자원을 전면 재배치해 PC 시대의 제왕으로 부활했다.
덴마크 에너지 기업 외르스테드(Ørsted, 구 동에너지) 또한 수십 년 자본을 투입한 북해 석유·가스 시설과 석탄 발전소라는 매몰 비용을 포기하고, 2017년 석유·가스 사업부를 매각해 모든 역량을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쪽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그린 에너지 전환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과거의 족쇄를 끊어내는 결연한 손절이 있을 때 기업은 새로운 미래로 출발할 수 있다.
철수 전략의 이면: 구조조정의 폭력성과 자본의 위선
그러나 '과감한 철수'와 '선택과 집중'이라는 세련된 수사 이면에 도사린 차가운 그늘도 직시해야 한다. 주주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업 철수와 구조조정은 흔히 합리적 자원 재배치로 포장되지만, 현실에서는 경영진의 전략적 실패 책임을 현장 노동자와 하청업체, 지역사회에 전가하는 폭력적 수탈로 변질되곤 한다.
유아아동완구업체 '토이저러스' 매장. (사진=뉴시스)
단기 수익에 매몰된 일부 사모펀드(PEF)의 약탈적 엑시트(Exit)가 대표적이다. 차입매수(LBO)로 막대한 부채를 피인수 기업에 떠넘긴 뒤, 본원적 경쟁력 강화 대신 배당과 수수료 추출을 위해 핵심 자산을 매각하고 대량 해고를 단행하는 식이다. 2005년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차입매수로 인수된 완구 유통사 토이저러스(Toys "R" Us)는 매년 수억 달러의 이자 비용에 짓눌려 디지털 전환 적기를 놓쳤고, 2017년 파산 신청을 거쳐 2018년 청산에 이르렀다. 파산 직전 최고경영진에게는 수천만 달러의 보너스가 지급되고 사모펀드들은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으나, 3만명이 넘는 노동자는 퇴직 위로금조차 없이 거리로 내몰려야 했다(이후 거센 비판과 투쟁 끝에 일부 기금이 뒤늦게 조성되었다).
일반 대기업에서도 무모한 신사업을 주도한 경영진은 특별한 타격을 입지 않고 챙길 건 챙기며 퇴장하는 반면, 실패의 대가는 해고된 노동자와 전용 설비에 투자했다가 연쇄 도산 위기에 몰리는 협력업체가 떠안는다.
존엄한 퇴각과 이해관계자 중심의 출구 전략
그렇다면 기업은 어떻게 매몰 비용 오류를 극복해 자원을 재배치하면서도,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책임을 지키는 존엄한 퇴각을 완수할 수 있는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의 전략적 철수는 단순한 비용 삭감이 아니라, 의사결정 오류를 예방하는 시스템이자 관계의 빚을 정직하게 청산하는 거버넌스의 시험대다.
첫째, 철수 과정에서 노동자와 협력사, 지역사회를 운명의 파트너로 대우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실천해야 한다. 프랑스의 미슐랭(Michelin)은 노후 공장을 폐쇄할 때 기습 해고 대신 '미슐랭 발전(Michelin Développement)' 전담 조직을 가동해 해당 부지를 산업단지로 재개발하고 중소기업을 유치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대체 일자리를 창출하며, 기존 직원의 전환 배치와 재취업을 끝까지 지원한다. 독일 지멘스(Siemens) 역시 전통 가스·에너지 사업부를 재편할 때 노조와 협의해 해고 없는 직무 전환을 위한 '미래 기금(Zukunftsfonds)'을 조성했다.
둘째, 조직 내부에 심리적 안전감과 제도적 견제 장치를 구축해야 한다. 알파벳의 혁신 조직 'X(구 구글 X)'는 타당성이 부족한 프로젝트를 스스로 조기 중단(Kill)한 팀에게 기업의 시간과 자원을 아껴주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보너스와 휴가를 지급한다. 아울러 인지심리학자 개리 클라인이 고안한 '사전 부검(Pre-mortem)' 기법을 도입해, 투자 전 "1년 뒤 이 사업이 처참히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원인을 역추적하여 명확한 '철수 기준선(Kill Criteria)'을 설정함으로써 리더의 헤일로 효과와 몰입의 상승을 차단해야 한다.
과거에 투입한 비용과 실패에 매달리기보다 철수 기준을 명확히 하고, 자원을 재배치하되 노동자·협력사 등 이해관계자까지 고려하는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이미지=챗GPT)
[안치용의 Critique: 다음 항해를 위한 결단]
베네치아의 소설 속 화자를 곧바로 매몰 비용 오류에 빠진 경영자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가 출발을 미루는 데에는 새로운 욕망과 어머니에 대한 반항, 이별의 불안이 뒤얽혀 있다. 그러나 결정을 유예하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러 선택의 가능성이 닫힌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철수 판단을 미루는 조직의 곤경을 비추는 비유가 될 수 있다.
기업 경영의 항해도 다르지 않다. 매몰 비용 오류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낭만적 미련이 아니라, 자신의 무오류성을 증명하려는 리더의 오만과 손실을 직면할 용기의 결핍이 빚어낸 비극이다. 진정한 리더십은 순풍에 돛을 달고 진격할 때가 아니라, 짙은 안갯속에서 오판을 겸허히 시인하고 과감하게 회선(回船)의 닻을 올릴 때 증명된다.
다만 그 철수는 금융공학자들의 차가운 메스여선 안 된다. 세례당의 냉기 속에서 화자의 어깨를 감싸안았던 어머니의 숄처럼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삶을 보듬는 정의로운 전환, 그리고 실패의 기억조차 훗날 새로운 창조의 밑거름(포석의 감각)으로 승화하는 성숙한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퇴각은 패배가 아닌 도약의 준비가 된다.
안치용 ESG비즈니스리뷰 발행인 겸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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