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내부적 저항감, 나토 국가의 생산 병목을 관통할 새로운 방산 패러다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전례 없는 격변 속에서 대한민국 방위산업은 거대한 도약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유럽 시장에서 이뤄낸 K2 전차와 K9 자주포의 대규모 수출 쾌거에 이어, 루마니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안보 전선의 핵심 생산 공백을 대한민국이 독보적인 제조 역량과 신속한 납기 능력으로 메워낸 것은 분명 위대한 성과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앙카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방산포럼 제4세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내 방산 빅4의 누적 수주잔고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합산 매출 40조원 시대를 정조준하는 가운데, 전 세계가 K-방산의 압도적인 효율성에 찬사를 보내며 우리 방산은 단숨에 글로벌 탑티어의 반열로 올라섰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 우리가 나토의 핵심 파트너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킬 중대한 분수령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현재 나토 회원국을 비롯한 서유럽 전통의 방산 강국들은 가파르게 늘어나는 안보 수요에 비해, 현지 제조 라인의 극심한 생산 병목 현상과 핵심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의 지연이라는 심각한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무기와 장비의 현지 조달 수요는 폭발하고 있으나 생산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토 국가들의 공백은, 강력한 제조 기반과 신속한 납기 신뢰성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을 글로벌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파트너로 부각시키는 결정적 장점이 되고 있습니다. 나토 국가들의 생산 한계가 역설적으로 K-방산의 가장 강력한 지경학적 무기가 된 셈입니다.
다만 이러한 눈부신 호황의 그늘 뒤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글로벌 안보 지형의 냉정한 기류는 짚어보아야 합니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성과는 우리의 구조적 역량이라기보다 유럽의 일시적인 생산 공백이 만들어낸 '지경학적 특수'이자 일시적인 호황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K-방산이 영토를 넓혀가자, 서유럽의 전통적인 방산 강국들과 나토 내부의 견제 움직임은 이미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이 공을 들였던 폴란드의 오르카 프로젝트나 최근 캐나다의 차세대 잠수함 프로젝트에서 겪은 진입 장벽의 경험이 이를 극명하게 증명합니다. 첨단 전략무기 체계로 갈수록 나토 회원국들 간의 끈끈한 이너서클 카르텔과 제도적 장벽은 완제품만 대량으로 밀어내는 방식의 역외 플레이어에게 쉽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려 합니다.
특히 유럽연합(EU)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자국 중심의 방산 규제 법안들은 대한민국 방산의 미래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유럽 자국 내 방산 제품 구매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역외 기업으로의 국방 예산 유출을 제한하겠다는 취지의 '유럽 국방산업전략(EDIS)'과, 회원국 간 공동 조달을 강제하는 '유럽 국방투자프로그램(EDIP)'의 입법화가 대표적입니다. 아무리 독보적인 가성비와 납기 능력을 지녔더라도, 현지 생태계와 상생하지 않는 일방향 공급 모델은 법적 장벽에 막혀 조만간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K-방산은 단순한 한국 방산 대기업의 시장 침투가 아닌, 나토 국가들의 생산 병목 공백을 파고들어 현지 방산 생태계와 공존하는 고도의 '상생 동맹'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안전한 범위 내에서 과감한 기술이전 및 합작법인(JV) 구조를 확립하고, 한국의 혁신 중소기업들이 다각적인 해외 현지 협력 인프라를 구축하도록 돕는 진정한 의미의 정책금융 전환이 시급합니다.
정책금융의 균형 잡힌 외연 확장과 수은법 제18조의 합리적 대안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정책금융이 걸어온 길을 전향적으로 돌아보고, 미래를 위한 균형 잡힌 시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간 한국수출입은행을 비롯한 정책금융기관들은 국내 방산 대기업들의 대규모 무기 수출 계약에서 든든한 금융 지원과 보증을 제공하며 K-방산의 외연 확장에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기업 완제품 중심의 수출 금융 성과를 넘어, 이제는 대기업에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국내 방산 생태계의 뿌리이자 미래인 중소·벤처·스타트업(중벤스)의 해외 진출과 하이테크 소재·부품·장비 기술 육성에도 정책적 자원을 균형 있게 안배해야 할 시점입니다.
한국수출입은행법 제18조 제3항이 '중소·중견기업의 수출입과 해외 진출을 위한 자금 공급'을 기관의 핵심 책무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는 법적 취지를 고려할 때, 우리 정책금융의 지평을 한 단계 더 넓히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기존의 대기업 주도 조달 보증 시스템의 성과를 존중하되, 이제는 법률이 지향하는 가치에 발맞추어 국내 방산 중소·벤처 생태계의 자립과 글로벌 영토 확장을 전방위로 지원할 수 있는 입체적인 금융 아키텍처를 가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토 국가들이 직면한 공급망 병목 현상을 혁신 중벤스의 고도화된 기술력으로 메워주며 글로벌 자본시장과 결합하는 과감한 패러다임 시프트는, 대한민국 방산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실리적인 돌파구가 될 것입니다.
자본시장에서 방산을 다시 정의하는 DSRB…대한민국 금융·안보의 골든타임
새로운 중소·벤처 상생 모델이자 나토 국가들의 공급망 공백을 장악할 최고의 금융적 엔진이 6·25전쟁 참전 혈맹이자 서유럽 최고의 금융 허브인 룩셈부르크를 거점으로 마련되고 있습니다. 캐나다가 강력하게 주도하여 설립을 추진 중인 초국가적 다자금융기구, '국방·안보·회복력은행(DSRB)'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DSRB는 최대 1000억유로(약 150조원) 규모의 저리 자금을 방산·안보·회복력 관련 프로젝트에 장기 공급하는 것을 초기 목표로 삼고 있으며, 국가만이 주주가 될 수 있는 소버린 소유 구조와 AAA 신용등급 획득을 목표로 설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번 앙카라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 기념비적인 다자금융기구의 공식 설립에 관한 선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방산의 향후 10년 밑그림을 좌우할 결정적 신호가 울리고 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알바니아, 벨기에, 그리스,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루마니아,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8개 파트너국의 공식 지지를 전격 이끌어내며 DSRB 출범의 확고한 궤도를 확보했습니다. 나토 핵심 채널 주변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들과의 생산적인 물밑 대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열어두고 습니다. 서방의 안보 자본 아키텍처가 인도-태평양 파트너를 향해 급격히 확장되는 지금, 우리가 이 흐름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는 대한민국 경제 안보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정무적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DSRB는 중견국 기여 그룹에 5억유로 내지 7억5000만유로(약 8800억원 내지 1조3200억원) 수준의 지분 출자를 요청하는 구조입니다. 일각에서는 국고 부담과 국회 예산 심의 절차의 복잡성을 이유로 신중론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DSRB 자본 참여는 단순한 출자나 재정 소모가 아닙니다. 현재 나토 회원국 다수는 자금 조달과 무기 공급 부족에 허덕이는 반면, 실제 압도적인 방산 생산능력과 제조 역량을 즉각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극소수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 핵심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특히 DSRB는 긴 조달 기간과 방산 특유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 장벽으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온 하부 중소·중견기업(SMEs)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들 기업에 특화된 보증 메커니즘을 제공해 방산 공급망 병목을 해소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6.25전쟁일 주간 및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월24일 인천 옹진군 해병대 연평부대를 방문해 K9A1 자주포에서 K6 조준 시연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또한 완제품 무기를 넘어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하이테크 소재 부품 등 민·군이 겸용 가능한 '이중 용도 기술' 스타트업의 생산능력 확충을 핵심 미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초기 자본 참여를 단순한 출자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초기 주주로 참여해 다자은행의 운영 규정과 조달 지침을 우리 국익에 맞게 설계하고 조율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국내에서 대기업 완제품 보증에 집중해 온 수은의 전통적 한계를 넘어서려면, 대한민국은 DSRB라는 다자 풀링(Pooling) 시스템에 초기부터 참여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회원국 하이테크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프로젝트 참여 우대 및 매칭 쿼터'를 기구의 설계 단계부터 반영하도록 금융 외교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국내 첨단 정보통신기술(ICT)과 소재·부품·장비 역량을 보유한 혁신 중소·벤처 기업들이 DSRB 자본과 연계된 유럽 현지 JV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나토 국가들이 생산 병목을 해소하는 과정에 우리 중소·벤처 생태계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금융 아키텍처 설계를 통해 유럽의 방산 보호주의 장벽을 넘고, 거대 조달 시장으로 우리 강소기업들의 경제 영토를 확장하는 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안보 국익의 실현과 초당적 금융 외교를 기대하며
외교·안보 라인과 방산 정책 당국자, 국가 미래 전략을 이끄는 여야 정책 결정권자들의 거시적 시야 확장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물론 실무적 변수도 적지 않습니다. 캐나다 등이 주도하는 DSRB와 미국 주도의 국방물자 조달체계, 미국 방산법 및 해외군사판매(FMS) 체계와의 상호운용성을 조율해야 합니다. AAA 신용등급 획득을 위한 핵심 출자국(소버린 백커)들의 출자 추이와 초기 분담금 투입에 따른 환율 변동성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단기적인 무기 완제품 수출 성과에 안주해 대외적 경계심을 키우기보다, DSRB라는 다자간 안보 금융 플랫폼의 태동기에 대한민국이 주도적 지분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혜안이 요구됩니다.
70년 전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했던 혈맹 룩셈부르크와의 지경학적 유대는 이제 나토 방위 체계의 풀뿌리 자본 형성까지 함께 책임지는 가치 동맹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정파적 이해관계와 관성적인 대기업 편중 예산 논리를 넘어, 나토 국가들의 생산 병목 공백을 한국 방산 중소·벤처기업의 글로벌 신뢰도를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기업의 경제 영토를 지속적으로 넓힐 수 있는 고도의 안보 금융 인프라 형성에 기민하게 나서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글로벌 안보 자본 시장의 신뢰를 선점하고 서방 세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을 때, 우리의 안보와 실리적 국익은 더욱 견고한 방파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정태혁 변호사·K-정책금융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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