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반도체 호황이 빚진 것들
2026-04-02 17:36:37 2026-04-02 18:01:14
2014년 봄이었다. 노동인권 변호사로 일하던 대학 후배와 저녁 술자리를 가졌다. 당시 한 중앙일간지 탐사기획팀으로 발령이 난 나는, 취재 아이템이 절실했다. 넋두리를 듣던 그 후배가 말했다. “근데 형,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은 잘 알려져 있는데 SK하이닉스는 왜 조용하지? 거기도 똑같은 반도체 회사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기사를 찾아봤더니 실제 SK하이닉스 노동자들의 산재 문제는 기사화된 경우를 찾을 수 없었다. ‘탐사기획-또 하나의 비극 하이닉스’의 시작이었다. 내가 반도체 이슈에 반년을 갈아 넣게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취재에 들어갔다. 우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와 접촉해 피해 사례 확보에 나섰다. 반도체 관련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공장이 환경에 큰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이천 하이닉스 공장 주변의 대기와 수질 환경오염 실태도 함께 들여다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와중에 하이닉스 클린룸에서 유지보수 업무를 담당하던 제보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각종 유해물질들의 일부가 대기중으로 바이패스(배출)된다고 했다. 굴뚝에 환경부가 달아놓은 센서로 배출가스를 실시간 스크린하고 있지만, 점검 대상 물질이 정해져 있는 데다 새로운 화학물질을 쓰는 반도체 공장의 특성상 제대로 감시가 이뤄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울대 쪽으로부터 포집기를 빌려 배출가스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했다. 공장 인근 저수지 물을 채취해 수질오염도 따져보기로 했다. 제보자에게 배출 지점에 포집기를 달아달라 부탁했지만, 신변 노출 위험 때문에 난색을 표했다. 4월 늦은 밤이었다. 공장과 면해 있는 3층짜리 직원 숙소 옥상에 기어올랐다. 녹슨 철제 사다리 탈 때, 사고의 두려움보다 ‘걸리지 않을까’ 심장이 마구 뛰었다. 공장 굴뚝과 최대한 가까운 곳을 향해 포집기를 달고 작동시켰다. 제대로 했는지 몰라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이튿날 저수지에서 물을 떠 채수통에 담았다. 건너 공장에서 누가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난 2월 반도체 산업 자녀산재 피해자가 이른바 자녀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백아란기자)
 
백혈병을 비롯해 각종 암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도 인터뷰했다. 숨진 남편을 대신해 산재 신청을 한 아내도 만났다. 취재 초기 매달렸던 환경 이슈는 끝내 기사화하지 못했으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국내 반도체 업체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역학조사 결과 등을 단독 입수해 피해자 사례와 함께 기사화할 수 있었다. 첫 보도가 나가고 SK하이닉스는 곧바로 피해자 실태조사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6년여 동안 시간을 끌고 있던 삼성전자와는 달랐다.
 
10년도 더 된 취재 후기를 뒤늦게 쓰는 것은 <뉴스토마토>의 ‘심층기획-반도체 하청노동자의 눈물’을 보고 일종의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 수출품목으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반도체 산업 뒤에 노동자들의 고통은 여전했다. 일하다 병을 얻은 이들에게 산재 승인의 문턱이 높은 점도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에게 집중되던 위험이 이젠 하청 노동자에게도 번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래전 취재 수첩을 뒤적이며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누리는 반도체 호황에는 노동자의 피땀 눈물이 얼룩져 있다고.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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