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토마토 김현철 기자] 캄보디아 범죄 조직들이 가상화폐를 기축통화처럼 활용하며 하루 50억원씩 세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금융당국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온라인 상품권을 이용한 자금세탁이 가상화폐보다 더 쉽고 빠를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28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금융감독원은 온라인 상품권을 통한 자금세탁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금감원 내부에서는 "안 걸리면 엄청나게 자금세탁이 될 수 있는 구조"라는 평가가 나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앞서 본지는 10월1일부터 A사의 4일간 50억원 상품권 거래를 통한 자금세탁 의혹을 연속 보도했습니다. 이후 10월21일 국정감사에서 박찬대 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이찬진 금감원장은 "즉시 검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금감원은 약속대로 당일 오전부터 팀장 등 3명을 A사에 투입해 31일까지 집중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A사의 거래 적법성을 따지는 것을 넘어, 상품권 결제 시스템이 자금세탁에 악용될 수 있는 구조적 문제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중입니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사진=금융감독원)
코인은 실명 확인 필수…상품권은 '대포통장'도 가능
가상화폐와 온라인 상품권의 가장 큰 차이는 본인 확인 절차입니다. 가상화폐 거래소는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실명 확인이 의무화돼 있습니다. 1인당 1개 계좌만 등록 가능하고, 모든 거래 기록이 남습니다. 월 소득 1000만원인 사람이 갑자기 1억원어치 코인을 사면 즉시 이상거래로 감지됩니다.
최근 캄보디아 범죄 조직들의 테더(USDT) 같은 가상화폐를 활용한 자금세탁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마저도 사설 환전업체를 거쳐야 하고 10~15% 수수료를 내야 합니다. 한국의 메이저급 사설 환전업체 6~8곳이 각각 하루 50억원씩 처리한다고 해도, 실명계좌와 연결되는 순간 추적이 가능합니다.
반면 온라인 상품권은 다릅니다. PG사가 제공하는 가상계좌를 활용하면 실명 확인 없이도 거래가 가능합니다. 입금자와 출금자가 달라도 문제없고, 대포통장을 활용해도 걸리지 않습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코인은 계좌가 특정된다"고 한 뒤 "기사에 언급된 방식을 활용한다는 전제하에 상품권은 대포통장을 활용해 더 편하게 자금 세탁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B2B 거래의 맹점…"하루 50억도 거뜬"
더 큰 문제는 B2B(기업 간) 거래입니다. A사 측은 개인(B2C) 거래는 1회 200만원, 하루 1000만원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하지만, B2B는 이런 제한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A사는 "B2B 테스트 거래"라고 주장하며 4일간 50억원을 움직였습니다. 9월18일 4억6900만원, 19일 16억3400만원, 20일 12억1400만원, 21일 14억2700만원이 상품권 구매 직후 전액 환불됐습니다. 모두 900만원 이하로 쪼개져 고액거래보고(CTR) 의무도 피했습니다.
금융 전문가들은 "진짜 테스트였다면 B2C 거래와 개인의 환불 과정까지 테스트했어야 한다"며 "B2B만 테스트한 것은 정상적인 테스트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입금자와 환불 수취인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의구심을 키웁니다. <뉴스토마토> 확인 결과, 23명이 입금했지만 환불은 47명(개인 42명, 법인 5곳)이 받았습니다. 김모씨는 8억9168만원을 입금했지만 7350만원만 받았고, 신모씨는 10만원을 넣고 1억5941만원을 받아갔습니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시스템은 다른 업체에도 쉽게 이식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관계자는 "A사가 사라져도 다른 라이선스에 붙여 재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습니다. A사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라이선스를 상실하더라도 다른 라이선스 보유 업체를 통해 이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A사가 보유한 선불전자지급수단 라이선스는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여서 진입 장벽도 낮은 편입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0월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코인의 불편함 해소"…제도 개선 시급성 제기
업계 관계자는 "코인 거래는 실명계좌 연결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상품권은 가상계좌만 있으면 끝"이라며 "코인의 불편함을 모두 해소한 완벽한 세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실제로 이번 사건 이후 한 시중은행은 가상계좌 용도를 확인하기 위해 A사에 연락했고, 다른 시중은행들도 뒤늦게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지만, 구조적 한계는 여전합니다.
지난 10월21일 국정감사에서 이찬진 금감원장은 "디지털 금융에서 이상 징후를 조기 발견해야 하는데 업종별로 법이 미비한 부분이 많다"고 인정했습니다. 내년 상반기까지 종합적 정비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사이 악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금감원은 오는 31일까지 A사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고 결과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자금 출처 확인, API 거래 추적 등으로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는 상품권 시스템을 다른 업체의 플랫폼에 연동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 인터페이스입니다. 금감원은 A사가 개발한 상품권 발행·환불 시스템을 다른 업체에 제공했다면, 그 대가로 받은 자금이 있는지, 또 이 시스템이 다른 곳에서도 자금세탁에 악용됐는지를 추적할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 관계자는 "만약 이 방식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한국이 세계 자금세탁의 중개지가 될 수 있다"며 "상품권 시스템이 범죄에 악용되지 않도록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김현철 기자 scoop_pres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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