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인과 타이인은 세계 창조와 인류, 그리고 자연과 동물의 탄생에 대한 독특한 설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창조 설화를 통해 신비롭고 흥미로운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 대륙의 동남부에 거주하던 이들이 서남부, 베트남 북단, 라오스와 타이로 이동하면서 설화의 시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고, 피압박 상태에서 지배 민족으로 성장하면서 따이인이 인도차이나 토착민을 노예화한 사실도 설화에 반영돼 있다.
창조의 여신 톨라니. 라오스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예나 지금이나 따이인의 창조주는 여신이다. 라오스의 절에서는 우물가에서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는 '톨라니'를 종종 볼 수 있다. 톨라니는 본래 따이인의 신이 아니라 인도 신화에서 수입된 존재다.
창조신
매꼭은 따이어로 '첫 번째 엄마'를 뜻하며 그들의 창조신을 부르는 말이다.
한 송이 꽃이 있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꽃잎 사이로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매꼭'이었다. 푸른 날개를 가진 나비가 있었다. 이 나비는 창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개똥벌레가 있었다. 개똥벌레는 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푸른 나비는 굼뜨고 게을렀으며 개똥벌레는 빠르고 부지런했다. 이러니 하늘은 좁아 넓은 땅을 다 덮을 수가 없었다.
매꼭은 개똥벌레가 만든 드넓은 땅의 양 끝을 실로 꿰어 푸른 나비가 만든 좁은 창공에 맞게 잡아당겼다. 구겨지고 당겨진 땅의 솟은 부분은 언덕, 산, 고원이 되었다. 매꼭은 푸른 나비가 만든 하늘의 꼭대기로 올라가 덮개에 구멍을 냈다. 비가 쏟아져 땅이 젖자 개천, 강, 호수, 바다가 생겼다. 매꼭은 비어 있는 하늘에 목화를 날려 흰 구름이 떠다니게 했다.
고추와 별사과로 만들어진 따이인
세상에 가장 먼저 나온 사람, 매꼭은 남편이 없었다. 개똥벌레가 만든 땅에는 생명이 없었다. 매꼭은 대지에 생명이 없어 활력이 없자 사람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녀는 커다란 두 개의 산봉우리를 딛고 다리를 벌려 섰다. 그때 세찬 바람이 불어왔고 매꼭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졌다.
매꼭은 거품이 이는 오줌을 눴고 그 오줌이 땅을 적셨다. 그녀는 오줌에 젖어 진흙이 된 땅을 파내어 자신을 닮은 인형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인형들에게 풀을 덮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 이틀, 사흘…이레. 그 이레를 또 일곱 번. 그렇게 49일이 지나갔다.
이윽고 매꼭이 풀을 들추자 진흙으로 빚었던 인형들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들은 뛰고 땅을 박차 오르며 저마다 소리를 질러 걷잡을 수 없었다. 매꼭은 숲으로 들어가 고추와 별사과를 양껏 따 와 난장을 치는 인형들 앞에 뿌렸다. 별사과를 집어 든 인형은 여자가 되었고 고추를 집어 든 인형은 남자가 되었다.
사람이 된 이들은 생명을 준 매꼭을 첫 번째 엄마라 부르고, 그녀를 조상으로 모시는 자손들은 꽃에서 나왔다 하여 '꽃할매'라 부르게 되었다.
따이를 창조한 여신 매꼭은 별사과로 여자를 만들었다.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생명의 탄생
매꼭은 알몸으로 푸른 나무들이 서 있는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대나무와 고추, 별사과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산을 끼고 흐르는 비취빛 강물은 용의 모습으로 굽이치며 흘렀다. 칼로 자른 듯한 절벽들은 강물로 몸을 던졌고 산자락은 늘 물에 잠겨 있었다.
매꼭은 여전히 쓸쓸한 세상을 향해 입김을 불어 움직일 수 있는 생명들을 만들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장대비를 몰고 와 큰물이 지면 모든 동물들은 매꼭의 자궁으로 피했다. 매꼭의 자궁은 커다란 동굴과 같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품어주었다.
매꼭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개구리, 새, 물고기를 사랑하고 신앙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들은 매꼭에게 새 생명의 잉태를 빌었다.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를 따랐다.
창조주 남편과 개똥벌레
'부롬'은 오늘날 남쪽으로 이주한 따이인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는 설화다. 후기 설화에서는 부롬이 매꼭의 남편으로 등장해 공동 창조주가 된다. 라오인과 타이인들은 경칭을 붙여 '쿤부롬'이라 부른다. 연구자들은 쿤부롬 신화가 따이인들이 베트남 북단 지역에 도달했을 때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알 모양의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를 깨고 한 사내가 나왔다. 그의 이름은 부롬이었다. 하늘과 땅은 원래 가까이 닿아 있었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손으로 별을 딸 수도 있었다. 태양이 나타나 볕을 내리쬐면 등에 업힌 아이가 새카맣게 탈 지경이었다. 번개가 코를 골면 누구도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부롬은 쇠로 된 나무를 쪼개 판자를 만들고 하늘을 내려앉혔다. 처음 세상이 만들어질 때 사람, 짐승, 새들은 함께 살았다.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새들은 새대로 앞을 다투며 떠들어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부롬은 사람은 말을 하게 하고 짐승은 짖게 하고 새는 지저귀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짐승과 새의 관리를 맡겼다.
사람들은 원래 아무 때나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고 아무 때나 배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먹고 아무 데나 싸서 세상이 지저분해졌다. 부롬은 사람들이 사흘에 한 번만 먹도록 정했으나 개똥벌레가 이 규칙을 하루 세 번으로 잘못 전달했다. 개똥벌레는 사람들에게 규칙을 잘못 전한 벌로 똥을 치우게 되었다.
커다란 반얀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부롬은 화덕을 만들어 불을 붙잡았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추위를 피할 수 있었고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농사와 집
장대비가 내려 큰물이 지고 땅이 잠겨버리는 일이 잦았다. 부롬은 힘센 소를 부리는 채찍으로 쟁기를 끌게 하여 붉게 탁해진 물을 바다로 흘려보냈다. 홍수로 여러 가지 곡식이 물에 잠겼다.
부롬은 산비둘기와 쥐를 보내 곡식을 건져 오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곡식을 몽땅 먹어치우고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부롬은 그들을 잡아 먹어치운 곡식을 토하게 했다. 부롬은 곡식을 배양했다. 모든 알곡은 유자만큼 컸다. 그는 곡식들을 잘게 부수어 곳곳에 뿌렸다.
부롬은 황소의 몸을 만들었다. 단풍나무를 다리로 삼고 큰 나무에 열리는 우유과를 젖꼭지에 붙였다. 내장은 바나나 줄기와 잎으로 만들고 바람에 깎인 돌로 간을 만들었다. 살은 붉은 흙을 이겨 만들었고 피는 소목(蘇木)의 붉은 즙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소 모양을 완성한 뒤 부드러운 풀을 뜯어 먹였다. 황소는 활력을 얻어 논밭에서 쟁기질과 써레질을 하게 되었다.
부롬은 사람들이 물에서 오리를 잡아오게 하고 나무에서 닭을 잡아오게 했다. 이렇게 달걀과 오리알을 얻었다. 병아리와 오리 새끼가 매나 새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활과 화살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동굴에서 살고 있던 탓에 논밭에서 일하려면 먼 길을 걸어야 했다. 부롬은 나무를 가져다가 목재로 켰다. 각재를 네 귀퉁이에 박고 판자로 난간을 둘러 공간을 만들었다. 지붕에는 나뭇잎을 덮고 띠를 둘렀다. 부롬은 사람들을 불러 그곳에서 살게 했다.
쿤부롬 신화는 창조여신 매꼭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한 전제 위에서 부롬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이야기다. 설화는 따이인의 세계가 모계사회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