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나의 알코올 일지④)저고리만 찢어라, 늙은 작부를 슬프게 하지 말라
2025-10-24 06:00:00 2025-10-24 06:00:00
「증취객」이라는 오언절구 한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아니, 술꾼이라면 알 것이다. 이향금이란 여인이 지은 것이다. 호가 매창인데 후대에는 그녀를 이매창(李梅窓)이라 기억한다. 기생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보면 1573년생으로 나와 있다. 「증취객」은 취하신 님께,라는 뜻이다. 취한 당신에게 드리는 시,라는 뜻이겠다. 
 
贈醉客(증취객)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당겨
羅衫隨手裂(나삼수수렬) 끝내는 비단 저고리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비단 저고리 아까워 그러는 게 아니어요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님이 주신 정마저 찢어질까 두려워요
 
서울 종로 인사동 입구 어디쯤 있는 술집 벽에는 키치적인 그림과 함께 이 시구가 쓰인 싸구려 액자가 붙어 있다. 그림이 예쁘다. 누가 그렸을까. 일단 디테일이 좋다. 조촐한 술상으로 보아 남자가 고관대작은 아닐 수 있겠지만 만약 저 자리가 목적(섹스)이 있는 2차나, 3차 자리라면 술상이 찬으로 가득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여자는 저고리가 뜯겼지만, 오히려 그렇게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남자를 측은해하는 표정이다. 남자는 완전히 취한 척 여자에게 안겨 있다. 하여, 이건 사랑이로세,이다. 
 
술집 '인사동 양조장'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사진=필자 제공)
 
작부와 술을 마셔본 건 열아홉 살 또는 스무 살 때였을 것이다. 군대에서다. 생일이 1월1일인 까닭에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친구들이 대체로 한 살이 더 많았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재수, 삼수까지 한 친구는 두 살이나 세 살이 많았다.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연상과 어울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대체로 여자 선배들이 나를 가르쳤다. 대학 1학년이었을 때가 불과 열여덟이었다. 마르크스를 배웠다. 바쿠닌과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책을 읽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열여덟에! 2학년, 5·18 시위 때 잡혀 군대에 끌려갔다. 열아홉 살이었다. 어린애가 군인이 됐다. 어찌, 6·25 때 학도병 같지 않은가? 전쟁은 대체로 애들을 데리고 한다. 총알받이로 그만 한 집단이 어디 있겠는가. 전쟁이 잔인한 것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애들을 이념의 카테고리 안에 몰아넣고 총을 맞게 한다는 것이다. 나쁜 놈들이다. 
 
군대는 크게 GP와 FEBA 근무로 나뉜다. 복잡하게 풀네임을 말할 필요는 없겠다. 쉽게 말해서 휴전선의 고립된 초소 GP에서 실탄을 삽탄한 채 방어 근무를 서느냐(그래서 종종 총기 난동 사고가 벌어진다), 아니면 그 하단, 그러니까 군사분계선에서 한 발짝 물러난 전방 지역인 FEBA에서 부대 근무를 서느냐의 차이다. 나 같은 '학적 변동자(데모하다 끌려왔다는 의미다)'는 월북 가능성 때문에 3년간 내리 페바에 있었다. 페바 근무는 줄곧 훈련의 연속이다. 그 중 완전군장 행군이 가장 힘들다. 게다가 나는 81㎜ 박격포, 중화기 중대였다. 포다리, 포열, 포판을 들고 메고 행군해야 했다. 종종 100㎞를 행군했다. 열아홉 살에 불과하던 나는 대체로 낙오했다. 그래서 많이 얻어터졌다. 발로 걷어차이고 M16 개머리판으로 철모를 맞기도 했다. 정신 차리고 졸지 말라는 의도였겠지만 늘 수치스러웠다. 그때 대대장은 이 데모하던 새끼,라며 수차례 그리고 자주 내 따귀를 때렸다. 그는 나를 어린놈의 빨갱이 새끼,라며 증오했다. 나도 그를 혐오하고 경멸했다. 그의 이름이 잊히지 않는다. H 중령. 죽었을까, 살았을까. 
 
100㎞ 행군을 24시간 안에 주파해야 하는 게 당시 훈련의 목적이었다. 새벽에 출발해 다음 날 새벽에 CP로 들어올 때는 몸이 한마디로 '걸레'가 되었다. 이미 동은 터오기 시작했고 저 멀리 정문이 보이는데 그 옆길로 여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부대 주변 술집의 작부들이었다. 나이들도 삼삼하게 먹은 여자들이었다. 부대 주변 술집 여자들은 가장 계급이 낮다. 남자가 광부가 되면 인생 막장이라 했다. 여자의 막장은 군부대 주변의 매춘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몸이 떡이 돼 부대로 기어들어 가는 내게(만은 아니지만) 오빠,라고 소리치며 껌을 입에 넣어주거나 막대사탕을 입에 물려준다. 소대장이나 중대장도 그럴 땐 모른 척 외면하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술집 작부와 술을 마시고, 키득대거나, 우린 군인 아저씨 예쁘게 생겼구나,라는 꼬심을 받을 때가 열아홉, 스물, 스물한 살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그때 저고리를 찢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도 없던 때이다. 다만 삶이란 것이 너무 무섭고 고독해서 작부들의 손길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창녀가 더럽고 해로운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가 세상의 악이나 오물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쩌면 다 그때의, 작부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영화 <내 슬픈 창녀의 추억>의 한 장면. (사진=Daum영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004년에 발표한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읽을 때 울적한 사랑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구십 먹은 남자에게 갓 창녀가 된 열네 살 소녀를 보내는 포주는 어떤 인간인가, 생각했다가 이 노인이 그 포주의 단골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저 노친네도 사실은 찰스 부코스키 마냥 음탕한 늙은이에 불과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송기원의 단편 「늙은 창녀의 노래」는 읽지 않았다. 양희경의 연극은 너무 유명해서 보지 않았다. 
 
늙은 창녀들은 시간이 흘러 호화로운 빌딩이 들어서 있는 서울역 양동이나 용산역 앞에 있었다. 어김없이 싼 술집이 가득했으나 지금은 도시 개발로 집창촌들이 싹 사라지면서 팬시한 주점들로 채워져 있다. 싸구려 술집들도 여전히 일부 남아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 싸지도 않다. 오래전 분위기를 아직 간직한 곳이 동자동인데 거기는 원래 쪽방촌 동네였다. 후암시장이 뒤에 있어서 돼지머릿고기를 파는 술집도 있다. 고기 누린내가 물씬 풍기는 곳이라 여염집 아낙네들은 꺼리는 곳이지만 돼지 간과 순대, 막걸리를 먹기에는 제격이다. 종종 저개발의 기억, 곧 늙은 창녀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갔던 시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과거는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 또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를 버리면 안 된다. 늘 잘 새겨들어야 한다. 에드워드 핼릿 카의 얘기였던가. 요즘, 이 E. H. 카를 극우 쪽에서 들먹인다지. 하기야 우파 교회에서는 스스로 디트리히 본회퍼라고까지 한다고 하니 할 말은 없다. 그들 중에 과연 늙은 작부와 술을 마셔본 적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술집 '인사동 양조장'. (사진=필자 제공)
 
「증취객」 시화가 걸려 있는 그 술집을 한동안 가지 않았다. 아니 다시는 가지 않았다. 불친절하다. 술꾼들은 친절함을 선호한다. 영화 시사를 다니며 술 마시는 경우가 많아 인사동이란 공간이 멀어진 탓도 있다. 예전에는 서울극장, 대한극장 같은 곳에서 시사를 했고 종3, 종1, 인사동이 그 라인이 다 그 라인이라 흘러 흘러 마시곤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용산과 삼성동, 건대 입구, 심지어 잠실의 롯데타워 같은 곳에서 시사를 한다. 영화에 대한 흥분이 잘 가라앉지 않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영화 시사를 끝낸 뒤 끼리끼리 모여서 한잔하는 버릇도 다 사라졌다. 영화 보는 사람들은 이제 다 따로 논다. 기본적으로 히키코모리들이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지 않으면서 자기 글만 줄창 써댄다. 모두 글이 늘지 않는다. 
 
영화기자 출신 후배인 S는 그래도 여전히 술을 마신다. 니콜 키드먼이 홀딱 벗고 나오는 영화 <베이비걸>을 보고 나서 코엑스의 한 현란한 중국집에서 술을 마셨다. 오로지 칭다오 맥주와 벨기에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밖에 없는 곳이었다. 니콜 키드먼은 이번 영화에서 젖가슴을 살짝살짝 보일락 말락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감독 할리나 레인의 카메라 워킹은 절묘했다. 상관없었다. S나 나나, 사회적 정치적 발기 능력은 잃어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늙은 평론가는 노래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군부대에서 만났던 내 슬픈 작부들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진다. 살아들이나 있을까. 지금 시대는 술이나 마셔야 하는 때다. 이럴 때는 소주가 있어야 한다. 위스키나 와인 따위. 지옥으로 꺼지라 할 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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