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릅니다. 그 물결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잠시 잊게 만듭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의 친구들, 형님, 누나 그리고 동생들에게… 매년 이때쯤이면 어김없이 한국의 추석 명절이 떠오릅니다. 곡식이 여물고 과일이 가장 맛있는 계절이지요. 한국에서 살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 이곳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9월과 10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날씨는 맑고 들판에서도 바다에서도 공기의 냄새가 유난히 신선합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한결 부드럽고 행복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때가 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시 한 구절이나 노래 한 소절을 저절로 흥얼거리게 됩니다. 마음 한편에서는 늘 한국의 하늘과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2020년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나의 많은 친구들은 비행기로 단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한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여의도와 마포, 명동 거리의 수많은 식당과 포장마차, 그리고 그곳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나의 친구들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습니다. 내가 즐겨 먹던 삼겹살, 갈비, 닭볶음탕, 설렁탕,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는 여전히 같은 맛이겠지요? 멀리서 그 향을 떠올리면 잠시지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집니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그 짧았던 거리와 잦은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서로 왕래가 줄어들면서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함께 나눈 식사 한 끼, 따뜻한 악수 한 번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그러나 다행히도 세상은 다시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과 블라디보스토크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서로의 땅에서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서 다시 연결된 인연들을 통해 한·러 간의 진짜 우정이 단순한 사업 관계를 넘어 마음과 신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요즘은 슈퍼마켓에 가면 점점 더 많은 한국산 식품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라면, 김, 만두, 김치, 아이스크림은 물론 사과와 딸기 같은 과일까지 진열되어 있습니다. 가끔 현지의 한국식당에 들르면 여전히 한국의 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그곳에서 나오는 공짜 반찬이 제일 맛있습니다. 배추김치, 콩나물무침, 깻잎절임, 무생채 같은 반찬들은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이미 다 먹고 나서 꼭 한 번 더 리필을 부탁하곤 합니다. 그런 소소한 행복이 이곳 생활의 큰 즐거움이지요.
정말 다행히도 요즘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수많은 한국 반찬의 재료인 배추, 무, 시금치, 깻잎, 고추 같은 채소를 직접 생산하는 농장들이 하나둘 늘고 있습니다. 한국 음식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기쁜 일입니다. 이제는 그런 신선한 재료들에 고기나 생선을 곁들여 먹던 그 맛을 이곳에서도 그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마치 한국의 들판과 식탁이 이곳 연해주 땅으로 옮겨 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나는 오래전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한국어를 전공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의 시와 노랫말을 시험 과제로 공부하며 외우곤 했지요. 30년 전 차만 타면 테이프가 다 늘어지도록 들었던 가수 조용필의 노래가 요즘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해 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그 노랫말을 떠올릴 때면 지금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의 하늘과 멀리 한국의 하늘이 동시에 마음속에 비칩니다.
그 사이로 흐르는 냇물처럼 우리 두 나라의 우정도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친구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바라보며 한국의 음식을 보드카와 곁들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그날을 기대하며… 나의 사랑과 존경심을 담아, 한국의 친구분들이 행복한 추석을 보내셨길 바랍니다.
유리 시바첸코 루스퍼시픽그룹 컴퍼니 대표. (사진=유리 시바첸코)
유리 시바첸코 루스퍼시픽그룹 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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