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광복절 연설을 눈여겨본다. 대통령실 연설행정관으로 일했던 직업병 탓이기도 하지만, 정부 국정 철학과 국가 비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선명한 청사진이라는 이유가 더 크다. 역대 대통령들도 연중 가장 공들이는 연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두 달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 수차례 독회와 수정을 거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취임 첫 광복절 연설의 무게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올해 광복 80주년 이재명 대통령 경축사 키워드는 한마디로 ‘상생을 통한 미래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정치권에 ‘연대와 상생의 정치’를 촉구했다. 갈등과 혐오, 이념과 진영에 기초한 분열의 정치를 탈피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남북한 간 ‘평화와 상생의 시대’를 강조했다.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이고 단계적으로 복원해 나갈 것과 신뢰 회복과 단절된 대화 복원에 북측 화답을 요구했다. 세 번째, 미래 지향적 상생 협력의 한일 관계 구축을 제안했다. 양국 협력을 통해 초격차 AI 시대를 함께 헤쳐 나가자고 하면서도, 과거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하라는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윤석열정부 3년간 광복절 연설문을 돌이켜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표면적으로는 자유, 인권, 법치라는 키워드를 내세웠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회적으로는 이념 갈등을 부추기고 정치적으로는 대화와 협치를 거부하고, 안보적으로는 북측을 자극하여 불안을 고조시킨 퇴행의 메시지로 일관했다. 한일 관계에서도 두루뭉술한 회복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떻게’가 없고, ‘어디로’가 없으며 과거사 문제를 직시하는 용기도 없었다. 특히, 극우 유튜버 주장과 다름없는 음모론으로 국민을 의심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범죄시하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는 작년 12월3일 자행한 불법 계엄의 전조였고, 그 결과는 최근 대통령 부부가 함께 구속되는 헌정사의 오점으로 이어졌다.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되었다.
이번 광복절 연설에는 지난 3년간 퇴행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국민주권 대한민국의 회복과 새로운 미래로 출발을 제안한다. 취임사에서 언급한 ‘모두의 대한민국’을 실현하려는 구상도 보인다. 광복절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국민 일상의 위협으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환경’ 이슈가 빠진 것은 살짝 아쉬운 대목이다. 올해도 빈번했던 수해와 홍수 피해는 결코 다음 세대 문제가 아니다. 기후와 환경은 민생과 안전의 핵심 사안이다. 다만, 20분 연설에 모든 사안을 다 포괄해서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년 연설문을 기약한다.
좋은 연설은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 이번 광복절 연설로 꿈꿔본다. 비무장지대에서 확성기 소음이 사라졌듯, 광화문에서도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방의 소음이 사라지기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에 이어 네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사실상 정례화로 이어지기를. 과거 아픈 역사에 대한 일본의 명시적인 사과와 신뢰 회복으로 가깝고도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서로 의지할 수 있기를. 그리고 세계가 한국의 모든 면을 부러워하고, 우리 모든 분야가 세계를 선도하는 표준 국가의 미래가 이뤄지기를. 비록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꿈일지라도, 하나씩 하나씩 도전하다 보면 꿈은 어느새 현실로 다가온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그냥 꿈에 지나지 않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을 믿는다.
곧 있으면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맞는다. 최근 대통령 지지율이 조금씩 하락하는 여론조사 추이가 나온다. 지지율은 늘 등락을 반복한다. 광복절 연설 속 내용이 정책 현장에서 제대로 실현된다면 반등은 언제든 가능하다. 국민은 담대한 비전과 과감한 실천을 바란다. 다가오는 한미 정상회담이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
장훈 GR KOREA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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