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최근 대법원이 진찰 중 환자를 강제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한의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습니다. 피고인은 환자가 물리치료를 마친 후 소화불량을 진찰한다는 이유로 환자의 가슴과 음부를 손가락으로 누른 혐의를 받았습니다. 여성 환자의 치골 부위를 촉진하다가 음부를 눌러 강제 추행한 겁니다.
서초동 대법원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1심 재판부는 한의학적 지식과 검찰청 의료자문위원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피고인의 혐의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원심을 깨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2심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가슴과 음부를 강제 추행한 것이 공소사실이므로, 치골 부위에 대한 진료 행위의 타당성은 공소사실 인정 여부와 관련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피해자가 한의원 진료 경험이 많고 직접 경험하지 않고 진술하기 어려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일관되게 진술하는 점, 피해자가 피고인을 무고하거나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동기나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봤습니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치골 부위를 중심으로 마사지하는 것을 음부를 누르는 것으로 잘못 인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음부를 접촉했다고 피해자가 일관되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치골과 음부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부위이며 피고인도 치골과 음부를 다른 부위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진술한 점을 보면 피해자가 착각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여성 환자의 치골 부위는 민감한 부위이므로 남성 의사가 여성 환자의 치골 부위를 촉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촉진을 하기로 했다면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거나 오해하지 않도록 간호사 입회, 피해자 동의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점도 유죄 인정의 근거가 됐습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2심의 판단을 긍정하고, 의료인의 진료 행위 과정에서 환자의 신체에 대한 접촉이 불가피하게 이뤄질 수 있고 환자의 내밀한 신체 부위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의료인의 신체 접촉 행위 등이 추행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평균적 일반인의 관점에서 △환자의 성별, 연령, 의사 △해당 행위에 이른 경위 △접촉 대상이 된 신체 부위의 위치와 특성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에 대한 진단·치료의 필요성 또는 위급성 △질병 등의 진단이나 증상 완화 및 호전 등과 해당 행위의 연관성 또는 밀접성 △행위가 이뤄지는 장소의 객관적 상황 △그 행위가 해당 의학 분야에서 객관적·일반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진료 행위로서 시술 수단과 방법이 상당했는지 △사전에 환자 또는 그 법정대리인에게 진료의 내용과 내밀한 신체 부위에 대한 접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 행위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것으로서 환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지를 기준으로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형법 298조(강제추행)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한 사람을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합니다. 대법원은 추행을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고, 성욕을 자극·흥분·만족시키려는 동기나 목적이 없어도 추행의 고의만 인정되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입장입니다.
대법원은 과거 폭행이나 협박의 정도에 관해 폭행 자체가 곧바로 추행에 해당하는 기습 추행과 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에 선행해 그 수단으로 행해진 경우를 나눠 전자의 경우 유형력의 행사 정도에 대소 강약을 불문하지만, 후자의 경우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23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에 선행하는 경우라도 그 정도가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력할 것이 요구되지 않고 신체에 대한 불법한 유형력 행사나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면 강제 추행이 성립한다고 입장을 바꿨습니다. 강제 추행의 성립 범위가 더 넓어진 겁니다.
강제 추행과 같은 성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둘이 있는 상황과 같이 은밀하게 이뤄져 피해자의 진술이 사실상 유일한 직접증거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만한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대법원은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고 구체적인지 △진술 내용이 논리와 경험칙에 비춰 합리적이고 진술 자체로 모순되거나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나 사정과 모순되지는 않는지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성범죄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 성정, 사회적 지위,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은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러한 특성을 고려하면서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면밀한 판단이 중요합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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