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경제계 뜨거운 감자였던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주주로까지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한 개정안은 대주주에 집중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소액주주 권한을 보호한다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들을 겨냥한 소송 남발과 경영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깊은 우려를 나타냈던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결국 처리되자 ‘재의요구권’ 행사를 요구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야당과 학계에선 재계의 과도한 기우라며 개정안이 회사와 전체 주주를 위한 당연한 원칙이라는 입장입니다.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상법 개정안은 이사가 충실해야 하는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넓히고, 상장 회사의 전자 주주총회 도입을 의무화하는 조항 등을 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3일 한국경제인협회는 논평을 내고 “경제계의 절박한 호소에도 이사 충실의무 확대를 담은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상법 개정은 우리 기업들을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내몰아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킴으로써, 국가 경제의 밸류다운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경제계는 우리 경제와 기업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위헌 소지까지 있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이 행사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입장문을 통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면서 “상법 개정이 아닌 자본시장법을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실효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법안이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저해해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누차 제기해 왔다”며 “정부가 동 상법 개정안에 재의요구권을 행사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이날 오후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야당 주도로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와 상장회사의 전자주주총회 개최를 의무화한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다만 여야와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와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이날 가결된 개정안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야당은 이번 개정안 통과를 통해 “대주주에 집중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소액주주 권한을 보호할 것”이라며 “증권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당은 기업의 경영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으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재의요구를 건의한다는 방침입니다.
이번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입니다. 종전에는 이사가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만 명시됐지만, 개정안에서는 충실의무를 ‘주주’로까지 확대했습니다. 또한 “이사는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조항도 신설됐습니다.
재계는 개정안 통과에 따라 각종 소송 남발 등 경영 불확실성만 커질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주주들의 배당 요구 등 이사들에 대한 무수한 소송이 잇따를 것이라는 겁니다. 현재 이사와 회사와는 충실 의무를 바탕으로 ‘위임 관계’가 생겼는데, 개정안 통과로 주주와 이사 간 위임 관계가 생기게 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배임’이 성립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위임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법적인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를 인정 해버리면 주가가 떨어지거나 주주에게 잘못할 경우 배임으로 인한 고발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며 “만약에 그것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관련 판단이 나올 때까지 경영 불확실성은 다 기업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토로했습니다.
소송으로 인한 경영활동 위축 우려도 큽니다. 신사업 진출 또는 투자·인수합병 등 굵직한 경영 이벤트가 발생했을 경우 반대하는 주주들의 적극적인 소송 남발로 일상적인 경영활동이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최근 대한상의가 발표한 ‘주주행동주의 확대에 따른 기업 영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장사 83.3%는 상법이 개정되면 주주 관여 활동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와 관련 대한상의는 “상법 개정으로 주주들이 충실의무 규정을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근거로 인식해 과도한 주주활동이 전개될까 다수 기업들이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투기자본의 공격 가능성도 재계가 상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 2003년
SK(034730)와 소버린의 경영권 분쟁
, 2016년과
2018년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각각
삼성전자(005930)와
현대차(005380)에 과도한 주주환원을 요구한 사례 등 투기자본이 의도적인 경영 개입을 할 공산이 크다는 겁니다
.
재계 관계자는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꼴”이라며 “기업 활동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의 사업이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가 없기에 일일이 규율할 수가 없는데 우리나라는 무슨 일이 발생하면 법에 규정을 하는 입법 만능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꼬집었습니다.
반면, 야당과 학계에선 재계의 우려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이날 찬성토론에 나선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주주들의 소송이 남발될 거라는 우려에 대해 “과장”이라며 “증권 집단소송이 도입될 때도 소송 남발을 우려했으나 지난 20년간 실제 제기된 소송은 12건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투기자본과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이 심화될 것’이라는 주장에는 “투기자본의 자양분은 상법 개정이 아니라 저평가된 주가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돼 장기 투자자들이 들어온다”고 맞받았습니다.
배임죄 적용 우려에 대해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장(고려대 교수)는 언론 기고문에서 "주주에 대한 의무 위반을 이유로 배임죄가 성립하는지도 의문"이라며 "배임죄가 성립하려면 위임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상법은 회사와 이사 사이에 대해서만 위임 관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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