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며 출발했던 윤석렬 정권은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가 국회에 의해서 무력화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윤정권이 취임을 하며 내세운 공정과 상식이란 비전은 “왜(why)와 어떻게(how)”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애초에 비전이 있었느냐는 반문이 제기된다. “왜(why)”가 있어야 국민들에게 동기부여 되어 통합을 이룰 수 있고, 어떻게 (how)”가 있어야 구체적 정책으로 실천하는 정부모습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상식’의 정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상식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sensus communis이다. 이를 옮기면 공통감각(common sense)이고 이는 일종의 공감이다. 공통감각을 도덕철학의 주제로 삼은 사람이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이다.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썼다. 『도덕감정론』의 주제는 공감이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전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공통감각을 공감(sympathy)이란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한다. 애덤 스미스는 공감을 타인의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때 그것을 같이 느끼는 감정으로 정의한다. 상식(공통감각)은 공감의 일종으로 다수의 사람들과 느낌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인간은 역지사지를 통해 주변 대다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이 상식(공통감각)이다. 그리고 이는 공감능력의 일부이다.
사실 공감은 유교, 기독교, 불교에서 쌍방 간의 관계에서 타인을 감정을 배려하는 윤리적 가르침이다. 애덤 스미스는 공감을 쌍방 간의 관계에서 가져야할 감정에서 양자의 행위를 지켜보는 제3의 관찰자적 관점으로 확장해서 설명한다. A와 B가 관계하다가 A가 B에 해를 끼치면 피해자 B는 고통을 받아 분개한다. 이 경우 가해자 A의 행동이 비도덕적이고 피해자 B의 분개는 정의로운 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이때 양자의 행위를 지켜보는 제3의 관찰자들이 개입한다. 제3의 관찰자가 피해자 B의 분개에 동의(공감)해주고 가해자인 A의 행위를 비난(반감)한다면 B의 분개는 정의롭고 도덕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제3의 관찰자들은 하나가 아닌 다수이고 어떤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즉 중도관찰자이다. 그래서 “공정한 관찰자”라고 부른다.
도덕원리를 설명하는 애덤 스미스의 공정한 관찰자 모형은 상거래나, 조직경영, 그리고 정치에 적용된다. 이는 우리 헌법에도 구현되어있다. 윤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탄핵이 되었고 탄핵에 대한 최종결정은 9명으로 구성된 헌법재판관이 내리게 된다. 이 재판에서 피고(가해자)는 대통령이고 원고(피해자)는 국회이다. 대통령과 국회 간 다툼에서 9명의 헌법재판관은 ‘공정한 관찰자’로 최종판단을 내리고 원고의 소추가 재판관의 동의(공감)를 얻으면 대통령은 파면된다. 정식 재판이 아닌 상황에서도 공정한 관찰자 모형은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번에 12.3 계엄 당시에 군사령관들은 윤대통령이 내린 명령에 동의(복종)했지만 현장의 사병들은 태업을 방불할 정도로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한 군사령관들은 그 명령의 정당성을 제3의 관찰자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았다. 여기서 제3의 관찰자는 공정한 관찰자로 중도적 입장의 대다수 국민들이다. 현장의 사병들은 대다수 중도적 국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그 명령이 부당한 것으로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윤대통령에게 공감한 군사령관들은 정의롭지 않았지만 사병들의 행위는 도덕적이었다. 그리고 행위자가 이러한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을 내면화 한 것이 양심이다. 여기서 애덤 스미스가 공감을 양자 간이 아닌 제3자의 관점으로 바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양자 간 공감, 특히 이들이 같은 집단에 속하면 이들끼리의 공감은 정의롭지 못하고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를 조장한다. 이를 제3자 관점으로 옮겨야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하여 도덕적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정당의 정치행위를 지켜본 국민이 공정한 관찰자 입장에서 선거로 정치권력을 선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정한 관찰자란 어떤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즉 중도관찰자이다. 요사이처럼 집단양극화의 시대에 국민들은 보수와 진보로 극단적으로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관찰자가 중요해진다. 현대 정치 마케팅에서 정권을 획득하는 공식은 중도유권자(보통 스윙보터로 불리는)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여야 한쪽이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서 승리해도 중도관찰자인 국민의 공감(동의)을 얻지 못하면 결국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2004년 다수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중도적 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해 탄핵을 주도했던 당들은 이후에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결국 공감에 기반 한 상식의 정치는 국민의 동의 얻는 정치 즉 민심을 얻는 정치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정치이다. 여기서 열쇠를 쥔 국민은 정파적이 아닌 중도적 관찰자인 것이다.
윤석렬 정권은 상식에 반하는 정책을 반복적으로 펴서 민심이반으로 실패하였다. 이런 민심이반은 윤대통령이 1월 15일 관저에서 체포되어 구치소로 수감된 날에 절정으로 표출되었다. 체포현장의 중계를 보면서 시청자들의 수많은 댓글을 살펴보니 대통령이 체포되는 것에 대한 분개심도 있었고 환희하는 댓글도 있었다. 이 중에서 눈에 띠는 것이 “내란성 불면으로 그동안 힘 들었는데 내일은 숙면할 수 있다”는 반응들이었다. 이는 공감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에 타인이 동의하거나 공감하면 즐겁고 타인이 부인하거나 반감하면 고통스럽다고 했다. 국민들은 정치를 관찰자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정치인의 행동 혹은 정책에 대해 동의나 공감으로 평가한다. 자신이 공감하는 정치나 정책에 즐거움을 느끼고 동의하지 못하거나 반감하는 정치나 정책에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정책당국이 왜 그런 정책을 펴야하는 지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면 불쾌를 넘어 고통을 겪는다. 소통부재도 고통의 원인이다. 불쾌한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서서히 쌓이다가 국민이 받는 고통이나 스트레스는 감내할 수준을 넘어선다. 이것이 민심이반이다.
결국 상식의 정치는 국민에게 고통(스트레스)을 주는 행위는 삼가고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정치를 하여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상식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이 정파적 국민들의 닫힌 공감이 아니고 정파를 뛰어 넘는 중도적 국민들의 열린 공감이다. 상식이 있는 정치가라면 국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치를 관전할 때 스트레스 받지 않고 발 뻗고 잠들 수 있게 해야 한다.
김근배 숭실대 명예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