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공 쇼크)①고전 IP 흥행 중국, 콘솔 게임 '제천대성' 노린다
한국 게임에 충격 안긴 '검은 신화: 오공'
'앙큼스런 원숭이 왕' 손오공 행적 찾기
시나리오·아이템에 개발자 애정 드러나
세계관 만들고 녹이는 능력이 IP 미래 좌우
2024-09-27 06:00:00 2024-09-27 06:00:00
한국 게임 신성장의 돌파구로 콘솔 게임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콘솔 시장 규모 591억4000만 달러 중 한국 게임 점유율은 1.5%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회사 게임 사이언스(Game Science)의 '검은 신화: 오공'이 출시 보름 만에 1800만장 판매를 기록하며 한국 콘솔 게임을 저 멀리 따돌렸습니다. 최근 한국 게임 전반에 걸쳐 위기론이 번지고 있는 가운데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오공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짚어봅니다. 아울러 한국 정부의 콘솔 지원 현황을 살펴보는 한편 한국 게임의 세계 콘솔 시장 연착륙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봅니다. (편집자주)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최근 중국 고전 소설 '서유기'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유기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낸 게임 사이언스의 첫 AAA 콘솔·PC 액션 RPG '검은 신화: 오공'이 발매 2주 만에 1800만 장 넘게 팔리며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원작 서유기는 자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돌 원숭이 손오공이 '제천대성(하늘같이 큰 성인)'을 자칭하며 천계를 뒤엎은 죄로 500년을 산 밑에 깔려 있다 풀려나, 삼장법사를 도와 서천 땅의 경전을 얻는다는 중국 4대 고전입니다. 검은 신화: 오공은 손오공 사후, 그의 고향 화과산에 살던 원숭이 한 마리가 손오공의 흩어진 여섯 영혼을 모아 환생시키기 위해 모험을 떠나며 시작됩니다.
 
손오공을 빼닮은 천명자가 곤봉을 늘려 적을 후려치는 '입곤' 자세를 잡거나(위), 곤봉을 내려치며 '항금룡'에 맞서고 있다. (이미지='검은신화: 오공' 웹사이트)
 
손오공 닮아가는 천명자 이야기
 
이 원숭이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천명자'로 불리는데요. 삼장법사를 도와 서천 땅에 갔던 오공의 생전 행적을 따라가면서, 그의 인연과 악연을 확인하는 재미가 찬사 받고 있습니다.
 
오공의 외모를 쏙 빼닮은 천명자는 토지신 등 오공을 기억하는 이들로부터 여러 능력을 전수받습니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앙큼스런 원숭이 왕' 손오공의 이리 뛰고 저리 나는 법술을 재현하며 전투하는 재미가 일품입니다. 특히 늘어난 곤봉 위에 앉아 술 마시다 적을 후려치는 '입곤' 기술은 오공만의 독특한 타격감을 선사합니다.
 
원작 서유기를 읽은 독자라면, 새로운 요괴를 물리칠 때마다 더해지는 '여행기'도 반가울 텐데요. 요괴들이 가진 저마다의 속사정을 서유기의 문체로 확인할 수 있고, 소설 속 삼장법사 일행이 겪은 사건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각 장을 마칠 때마다 해당 구간을 관통하는 주제로 애니메이션이 펼쳐지는데요. 1막을 마치면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의 금란가사를 훔치려 살인을 교사했던 주지승의 말로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욕심을 가져보지 않고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며 무릎을 치게 만들기도 하죠. 2막 말미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람의 간사함은 요괴와 다를 게 없다고 지적해 뜨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천명자가 처치한 요괴에 대한 일화를 읽을 수 있지만, 번역되지 않은 일화도 적지 않다(위). 동굴이나 건물에서의 명암 처리도 어색하다. (이미지='검은신화: 오공' 실행 화면)
 
서유기 독자들이 반길 만한 장치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 각 장을 마치는 애니메이션이 끝나면 커다란 족자 그림이 펼쳐지며 지난 여행을 톺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두루 살펴본 뒤 계속 진행하려면 '다음 회에서 풀어보기로 하자'는 문구를 눌러야 하는데요. 이건 원작 서유기의 각 회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문장입니다. 실제 소설은 "과연 앞으로는 또 무슨 일이 생길 것이며, 어느 때에야 서천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인지, 다음 회에서 풀어보기로 하자"는 식으로 맺습니다('서유기' 4권,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문학과지성사).
 
이 작품에 대한 개발자들의 애정은 아이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명자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야자술에 적힌 설명은 "자, 어서 야자술을 만들러 가자! 우리 대성 어르신을 대접해드려야지!"인데요. 이 역시 소설 속 문장에서 가져온 겁니다. 저팔계의 이간질로 삼장법사의 미움을 사 쫓겨난 손오공이 화과산에 돌아갔을 때 원숭이들이 했던 말이죠('서유기' 3권). 각종 약재와 술병 등 아이템을 360도로 돌려가며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게임 주인공 천명자가 체력을 회복하거나 축지(순간이동)할 때 가는 '토지신 사당'도 원작 소설에 자주 등장합니다. 손오공은 옥황상제의 조카 이랑진군과의 싸움에서 밀리자, 토지신 사당으로 변신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꼬리를 감추지 못해, 사당 뒤에 깃대를 세워 들통났는데요. 게임에선 천명자가 토지신 사당이 없는 곳에서 요괴 대왕에게 재도전할 때마다 깃대 아래서 환생하고, 이 깃대는 머지 않아 구름처럼 흩어집니다.
 
오공 개발사 게임 사이언스는 기존 게임에 없던 요소를 창조하진 않았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패드인 듀얼센스의 각종 진동 기능 활용도 퍼스트 파티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눈 덮인 지역에서의 프레임 속도 저하도 심각합니다. 동굴이나 건물을 드나들 때의 명암 처리도 어색해, 화면이 제대로 안 보이는 구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등장 인물과 각종 아이템, 여행기, 시나리오에 서유기의 설정을 꼼꼼히 반영·재해석해 대중성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공은 보스전이 소울류처럼 어려워도 재도전을 멈추지 않는 게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저팔계가 천명자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미지='검은신화: 오공' 실행 화면)
 
세계관 그리는 능력 키워야
 
한국에도 서유기 못지않은 IP로 주목 받았지만, 오공과 달리 흥행에는 실패한 사례가 있습니다. 액션스퀘어가 만들고 YJM게임즈가 배급한 온라인 소울라이크 게임 '킹덤: 왕가의 피'입니다. 이 게임은 사전 예약자 100만명을 넘기며 이목을 끌었지만, 올해 3월 출시 이후 부정적인 평가로 12월10일 서비스 종료를 앞두고 있습니다. 부실한 서사와 조작감 등으로 모바일·PC 게이머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앞서 네오위즈(095660) 'P의 거짓'과 넥슨 '데이브 더 다이버', 시프트업 '스텔라 블레이드'가 전 세계 콘솔·PC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게임계에선 '한국'을 연상케 하는 IP가 킹덤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초 회사가 이 게임을 소울류로 만들고도 콘솔로 내지 않고 온라인 게임 수익 모델(BM)을 적용해 이도저도 아닌 게임이 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학계는 게임의 공급량보다 '재미'에 초점을 맞춰, P의 거짓 같은 성과를 꾸준히 낼 방법을 찾아야 콘솔 시장을 키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정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게임법·정책연구센터 센터장(겸임교수)은 "한국 콘솔 게임의 다량 공급보다는 시장 참여자들이 '재미있게 잘 만든 콘솔 게임'이 나올 방법을 머리 맞대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명자가 소뇌음사 깊숙이 들어섰다. (이미지='검은신화: 오공' 실행 화면)
 
그렇다면 서사와 연출, 전투 모두 높이 평가받는 콘솔 게임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게임계에선 '검증된 온라인 게임 BM'만 만들어 단기 수익에 치중해선 제대로 된 콘솔 IP를 기획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특히 한국은 개발 부서보다 사업 부서 목소리가 크다 보니,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IE) 퍼스트 파티(독점) 게임 '아스트로봇' 같은 깜짝 흥행작을 내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SIE는 산하 스튜디오의 게임 개발 과정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게임 업계 관계자는 "'삼국지' 게임으로 유명한 일본 코에이 테크모에는 이 시리즈를 30년 간 만들어 온 개발자가 있는데, 그에 비해 한국의 개발 환경은 어떠냐"며 "일본은 자체 퍼블리싱(배급)을 잘 하지 않고 철저히 개발에 집중하는 반면, 한국 게임사들은 둘 다 하다 보니 사내에서 개발과 사업 부서 간 이견이 있을 때 결국 사업 부서가 이기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개발자는 타사가 시도하지 않은 '재미'를 추구하지만, 검증된 BM이 아니다보니 붕어빵 같은 게임을 만들라는 압력이 올 때 결국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존 BM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갖는 게 우선"이라며 "앞서 중국이 한국 기술을 배웠을 정도로 한국은 아이디어와 기획력, 기술력이 부족하지 않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기존 BM의 성공에 안주하다보니 변화하기 어려웠다"고 진단했습니다.
 
이어 "한국 게임사도 서유기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지만, IP를 게임에 녹여내고 발전시키는 방식이 너무나 뻔하다"며 "킹덤 게임도 큰 회사가 많이 투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업계에서 고인물이 고인 게임을 만들려고 하는 점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증권가에서도 콘솔 게임의 역량 확보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강석오 신한증권 연구원은 최근 게임스컴 탐방 보고서에서 "PC·콘솔 게임 개발에서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한국과 중국 개발사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큰 세계관과 스토리를 설계하고 이를 온전히 게임에 담아내고, 이후 시리즈로 이어나가는 부분"이라며 "신작 하나의 매출이 높다고 IP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사랑해줄 수 있는 팬덤이 많은 게임이 중장기적으로 훌륭한 IP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기술적인 부분은 국내 개발사들도 부족하지 않지만, 세계관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데에 있어서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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