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폴댄스를 배운지 어느덧 4년차가 되었다. 폴댄스에는 우리끼리 하는 말로 '영상버프'란 것이 있다. 안되서 고생하거나 힘들어하던 기술을 영상을 찍을 때 갑자기 기적처럼 성공시키는 걸 두고 바로 영상버프라 부른다. 참고로 폴댄스는 동작을 제대로 예쁘게 하는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 모니터링하기 위해 대개 진도를 영상으로 찍어둔다.
처음에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상을 찍을 때면 으레 수업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경할 겸, 자기 순서를 기다릴 겸, 영상을 찍는 사람을 지켜보기 마련인데,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인지라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손에 땀도 나고, 몸은 고장나고, 그러다보니 다음 동작도 까먹고. 늘 그렇게 버벅거리곤 해서 매번 남들 안 보는 구석에서 몰래 숨어서 혼자 찍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이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다. 영상을 찍을 때면 나도 모르게 숨어 있던 괴력이 솟아나는 것 같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좌절과 짜증을 유발하던 기술이, 영상을 찍는 바로 그 순간에, 정말 귀신같이 성공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의 희열은 차마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냥 바로 성공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자신감이 샘물처럼 퐁퐁퐁 솟아난다.
때로 궁금해지곤 했다. 왜 유독 영상을 찍을 때만 이런 '괴력'이 솟아나는 걸까? 아무리 애써도 안되던,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무리라고 생각했던 동작이 영상을 찍을 때는 왜 되는 걸까?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찍어두었던 영상을 돌려보다 문득 깨달음이 왔다. 어쩌면 그건 바로 '주인공'이 된 느낌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공연하는 과정에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솟아나고,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집중력과 괴력이 솟아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미국 작가 비비언 고닉은 일찍이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마치 공연을 하듯 매 순간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폴댄스야말로 이러한 '공연'에 최적화된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기 인생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매 순간은커녕, 현실에서는 자기 삶에서조차 주인공이 되기 어렵다. 조연이라도 되면 다행, 일상의 대부분은 엑스트라나 단역같은 시간 속에서 지나간다.
그런데 폴댄스 영상을 찍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순서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작을 촬영하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공연자의 성공을 바라며 지켜본다. 잘하면 환호하고 실수하면 아쉬워하면서도 격려한다. 헤매는 것 같으면 다음의 방향을 안내한다. 끝나면 다 같이 박수치며 기뻐한다.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은 공연의 성공을 기뻐하며 다음 무대를 위한 관객이 된다. 이러한 관객의 소중함, 나를 지켜보아주는 타인들의 소중함을, 나는 폴댄스를 하면서 비로소 깨우친 것 같다.
한승혜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