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 거부권…마지막까지 짓밟힌 입법권
전세사기법 등 4건에 거부권 행사…민주화 이후 최다 기록 다시 경신
2024-05-29 18:22:41 2024-05-29 18:27:34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가운데)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 대통령 국빈 방한 공식 환영식이 끝난 뒤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마지막까지 무소불위 재의요구권(거부권)…' 윤석열 대통령이 21대 국회 마지막 날까지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되풀이했습니다. 29일에만 무려 4건의 법안을 거부했습니다. 국회 임기 만료를 하루 앞두고 이와 같이 무더기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거부권 행사 법안 수도 민주화 이후 최다 기록을 다시 경신했습니다. 4·10 총선 참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 대통령의 입법권 무력화 시도가 이어진 셈입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을 비롯해 민주유공자법, 농어업회의소법, 한우산업지원법 재의요구안이 의결되자 이를 재가했습니다. 지난 2016년 19대 국회 때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 개원 이틀 전에 '상시 청문회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박근혜 그림자'가 보인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총선 참패 이후 거부권 5건…전체 30% 이상
 
이들 4개 법안은 21대 국회 마지막 날인 이날 재의결되지 않으면서 자동 폐기됐습니다. 앞서 민주당 등 야당은 전날 '선구제 후회수' 방침을 담은 전세사기특별법과, 민주화운동 사망자·유가족을 예우하는 민주유공자법, 농어업인 대표조직 설립의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한 농어업회의소법, 한우산업 발전을 위해 노아를 지원하는 한우산업지원법, 세월호 참사 피해자의 의료비 지원 기한을 5년 연장하는 세월호참사피해구제지원법을 국민의힘이 퇴장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정부는 이 가운데 세월호참사피해구제지원법은 원안대로 의결했습니다.
 
한 총리는 4개 법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한 총리는 전세사기특별법에 대해 "주택도시기금 부실화가 우려된다"고 했고, 민주유공자법에 대해선 "(민주유공자) 대상자 선정 작업이 자의적으로 이뤄질 소지가 크다"며 "국론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농어업회의소법이 시행되면 농어업인의 국가 재정 의존도가 높아질 것이고, 한우산업지원법으로 인해 돼지·닭 등 다른 축종 농가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로써 윤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법안을 다시 국회로 돌려보낸 법안은 총 14건이 됐습니다. 민주화 이후 최다 거부권을 사용한 노태우 전 대통령 7건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1988년부터 윤 대통령 취임 전까지 행사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총 16건으로,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14건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14건 중 총선 이후에만 '채상병 특검법'(순직 해병 사망사건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포함한 5건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인데, 비중을 보면 30%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국민은 늘 옳다"더니…윤, 민심에 역행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18일 대통령실 참모진과의 비공개회의에서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며 민심에 부응하는 행보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총선 참패 이후 지금까지 오히려 민심에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국민 다수가 찬성하는 법안에 대한 잇따른 거부권 행사가 민심과 다른 길로 가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윤 대통령의 잇따른 거부권 행사에 대해 “총선 패배 이후에도 윤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는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고 진단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로, 22대 국회에선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개헌 논의가 촉발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앞서 윤호중 민주당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제한하도록 개헌하자는 공개 제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실제 거부권 행사만 제한하는 개헌이 이뤄질 가능성은 적지만, 향후 대통령의 인사권, 입법권, 예산권 등 대통령의 권한을 굉장히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개헌 논의는 계속 이뤄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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