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그 이상의 초현실. 사건 발생도 보도 경위도 수습 대응도 '이성의 굴레'를 벗어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의는 오독됐습니다. 이성적 통제도 없었습니다. 합리성은 거세당했습니다. 정상 범주를 벗어난 상식 밖의 발언과 행위만 난무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 이슈로 떠오른 '김건희 명품가방' 수수 의혹, 이른바 한국판 마리 앙투아네트.
또 하나.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세 차례나 발생한 이른바 '용산발 입틀막(입 틀어막기)' 사태. 두 사건이 묘하게 오버랩됐습니다. 민심을 외면한 채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징후적 사건. 제왕적 대통령 탈피를 명분 삼아 용산 시대를 연 윤석열정부가 구중궁궐로 전락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침묵 아니면 맹종.
이태원 유가족에 유독 박절한 윤 대통령
설 연휴를 앞둔 지난 7일 오후 10시. 전 국민의 시선이 쏠린 윤석열 대통령의 KBS 대담. 진행자는 김건희 여사가 받은 명품가방을 '외국회사에서 만든 조그마한 백'으로 표현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누구한테 박절하게 대하기는 참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귀를 의심했습니다. 질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고 답변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소통'의 외피를 쓴 비루한 답변.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 의혹이 쟁점인 대형 사건에 웬 '성정' 타령입니까. 국민이 원하는 답변은 '박절'이 아니라, 청탁금지법 위반 여부의 쟁점인 '직무 관련성'입니다. 대통령의 사전 인지 가능성 등에도 함구했습니다. 박절을 앞세운 윤 대통령의 감정 호소에 명품가방 의혹은 '조그마한 백' 사건으로 둔갑했습니다.
시작부터 그랬습니다. 자신의 주가조작 의혹을 규명할 특검법이 발의(지난해 9월 7일)된 지 불과 엿새 후 받은 명품가방. 생각은 짧았고 말은 가벼웠고 행동은 경박했습니다. 권력과 탐욕으로 점철된 영부인의 전례 없는 집착이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윤 대통령의 '이중잣대'입니다. 윤 대통령님, '누구한테도 박절하기 어렵다'면서 왜 유독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는 그리도 매정하십니까. 대통령님 입에서 박절을 듣는 순간,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비롯해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피해자인 '노동자'(노란봉투법)와 '농민'(양곡관리법) 등이 머릿속을 스쳐 갔습니다. 정부에 반하는 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된 침묵'과 뭐가 다릅니까. 참으로 비정한 정부입니다.
나가도 너무 나간 '공포정치'…다층적 위기
침묵 다름엔 '맹종.' 잊을만하니 또 등장했습니다. 용산발 입틀막 사태.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2월 1일)에 이어 지난 16일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학위수여식. 윤 대통령 축사 도중 한 졸업생이 연구·개발(R&D) 예산 축소에 항의하자, 대통령 경호처 요원들은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강성희 진보당 의원(1월 18일)에 대한 과잉 경호 논란이 발발한 지 한 달여 만에 세 차례나 입틀막 사태가 일어난 셈입니다. '안하무인 정부'의 확인 사살입니까.
제아무리 양보해도 대통령 심기 경호를 위한 폭력 제압입니다. 서슬 퍼런 공포를 앞세워 군사정권을 옹위하던 '백골단'과 무엇이 다릅니까. '차지철'(박정희 정권 시절 마지막 경호실장)의 망령이 어른거립니다. 공교롭습니다. '강성희 입틀막' 사건이 발생한 날, 여당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안)의 거부권 행사를 윤 대통령에게 건의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이념 과잉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여당은 강 의원 사태 당시 "반정부 투사로 보이려는 운동권 특유의 영웅주의"라며 이념의 외피를 덧씌웠습니다. 논점 일탈도 일삼았습니다. 카이스트 졸업생이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으로 알려지자, 난데없이 '사전계획설'을 제기했습니다. 편향된 선악을 앞세운 전형적인 '인식 공격의 오류'입니다. 극단의 정치엔 민주주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눈을 떠보니 민주주의가 후퇴했습니다.
최신형 정치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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