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 정치는 4류, 기업은 2류…지금은
2023-12-15 06:00:00 2023-12-15 06:00:00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반도체 공장 건설을 신청해도 허가가 나지 않는다"며 새 정권이 들어서도 달라진 게 없다면서 이같이 꼬집은 겁니다.
 
총수의 이 같은 발언은 정치권에 크나큰 후폭풍을 몰고 왔는데요. 문민정부임을 자부했던 김영삼(YS)대통령은 해당 발언에 대노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권 실세들의 불쾌감을 사면서 삼성은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수행단 기업인 명단에서 빼버리거나 삼성 기공식에 고위 공무원을 보내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는데요. 정권으로부터 이른바 '찍힘'을 당한 겁니다. 결국 이 선대회장은 반도피성으로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당시 정치인들에겐 '어디 감히 기업인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렸던 겁니다. 기업인을 정치인이 권력으로 마음껏 부릴 수 있는 '돈 버는 상인'쯤으로 치부한 건데요. 상인이 가장 말단에 위치한 사농공상(士農工商)적 봉건시대의 계급 관념도 작용했을 터입니다.
 
경제와 정치에 대한 소신을 거침없이 일갈한 이 선대회장의 어록은 대중의 속을 통쾌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삼성이 홍역을 치러야 했던 것을 반추해보면 현재 주요 그룹 총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 한 일화이기도 합니다.
 
28년 전 일화를 다시 꺼내드는건 '4류 정치가 2류 기업의 발목잡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섭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을 줄줄이 대동하고 부산에서 떡볶이를 먹이는 모습으로 부정 여론이 커지고 있는데요. 
 
총수 중 MZ세대이자 막내뻘인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의 떨떠름한 표정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시식 자리가 탐탁지 않다는 김 부회장의 표정이 영상을 통해 퍼져나가자, 김 부회장이 깨작거리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등의 반박 기사까지 양산되고 있습니다.
 
부산시민들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이름을 연호하자 이 회장이 '쉿'하는 모습도 요며칠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후에 "이름 부르지 말아주세요"라는 이 회장의 워딩이 전해졌는데요. 시민들이 이재용을 연호하니 윤 대통령이 불쾌할까 이 회장이 염려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상이 어떻든간에 기업 총수들을 불러모아 이러한 소모적인 일들을 정권이 앞장서서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이건 권력의 횡포"라고 촌평했는데요. 장 소장은 "(총수들이) 수사·세무조사 등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겠는가"라며 "(대통령이)자꾸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과거로 회귀가 아닐까. 그런 것들을 너무 즐기시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정치권의 시대에 뒤떨어지는 퍼포먼스는 우리 기업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재계 한 인사는 "까놓고 말해 우리는 돈 버는 데만 집중한다"면서 "총수들이 떡볶이 먹는다고 떡볶이 산업이 커집디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인대 부상에 목발 신세를 지며 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모습은 한때 미담처럼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에 총수가 목발을 짚고 글로벌 기업인들과 신산업 육성에 대한 인사이트를 주고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정치권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산 엑스포 참패로 그 민낯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엑스포 얘기가 나올 때마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많이 따라잡았다", "엑스포는 2차까지 가면 승산이 있다"는 희망 섞인 주술적 발언을 해왔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권 인사는 "엑스포 유치에 막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분을 4개월 전 만났는데 너무 꿈에 부풀어있더라. 그때부터 안 될 것을 직감했다"면서 "엑스포 유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기 정치를 해보겠다는 속내를 털어놓던데 속으로 '꿈깨쇼'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습니다. 
 
특히 참모들이 부산 엑스포 '광팔이'를 통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는데요. 직언을 할 참모가 없었다는 게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정치권 고위 인사는 사석에서 "직언을 하면 화를 내는데, 누가 목숨걸고 쓴소리를 하겠느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 선대회장이 '정치는 4류'를 일갈한 후 강산이 두번 바뀌고 세번째 바뀌는 시점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6번이 교체돼도 도통 달라진게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5류, 6류를 넘어 밑바닥으로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우리 기업은 세계 유수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내적 체급을 키워냈습니다. 삼성, 현대차, LG, SK는 우리 경제 발전과 더불어 국위선양을 하는 기업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제 더는 2류가 아닌 1류 반열에 들어섰다고 평가될 정도입니다. 
 
우리 기업이 이렇게 괄목할 성과를 거둔 배경에는 총수의 리더십과 임직원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지속돼왔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당장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인 데 따른 성과이기도 합니다. 공장에 쌓아둔 5000만 달러어치 불량품을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이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멈추면 죽는다'는 생존법칙을 터득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정부는 집권 2년차를 넘어, 아니 퇴임 이후 조차 안중에 없는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총선용 행보인 '떡볶이 쇼'로는 결코 성난 민심을 다독일 수 없단 걸 언제쯤 깨닫게 될까요. 정권은 5년 시한부입니다. 정권이 50여년을 영속해온 기업들의 생존법칙을 배우지 못하면 그 끝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임유진 재계팀장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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