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민영 기자] 최근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후 정당방위의 범위에 관심이 쏠립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정당방위 인정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적인 데다 기준도 모호하다는 지적이 꾸준했습니다.
물리적인 방어 또는 제압 과정에서 피해자나 경찰이 쌍방 피의자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살인도 정당방위로 인정되거나 경찰의 면책권이 넓은 해외 사례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침입자 제압했더니 미국은 정당방위, 한국은 징역?
미국에서는 한 여성이 낯선 남자의 침입이 우려되자 총을 쏜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성은 사망했지만 여성에게는 정당방위가 인정됐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2014년 강원도 원주의 한 주택가에서는 20대 남성이 도둑을 제압했는데, 이 도둑은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습니다. 검찰은 제압이 과도했다며 남성을 기소했고 법원은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 법'(Stand Your Ground Law)을 통해 집 주인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경우 총기로 방어할 수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 개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없고, 치안 수준이 세계에서 손 꼽힐 정도로 높은 한국과는 애초에 법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정당방위였는데 한국에선 기소
학교폭력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배우 이상희씨 아들이 미국에서 동급생과 싸우다 숨진 사건인데요.
미국에서는 이씨의 아들을 숨지게 한 가해자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했지만 한국은 폭행치사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결국 무죄 판결이 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당방위가 얼마나 과잉이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따진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는 형법 제21조에 따라 5가지의 조건을 만족해야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입니다.
"현 제도 하에 사법 판단 중요"
그런데 실제로는 이를 모두 적용하면 정당방위의 범주가 매우 제한적인 나머지, 피해자가 상대방에게 반격을 하는 과정에서 상해가 일어나면 쌍방 처벌 소지가 있습니다.
부당한 침해가 '현재'에 한정된다는 점은 특히 논란입니다. 예를 들어 수년 간 성폭력을 일삼은 의붓 아버지를 살해한 피의자는 현재보다 '미래'의 위험에 대비한 공격을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이유'의 기준 또한 전문가들조차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모호합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공격이 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방어하는 것이 현재를 위한 것인지, 미래까지 내다보는 것인지 판단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정당방위에 관한 법은 완화될 경우 악용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현 제도 하에서 사법적인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신이철 원광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 등의 도움을 기다릴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개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정당방위"라며 "다만 정당방위 인정 범위를 늘릴 경우 국가기관에서갖고 있는 형벌권을 개인이 사적으로 악용할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법을 완화하는 것보다는 수사·사법기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의 여성·시민사회단체가 2020년 5월6일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한 이후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접수했다. (사진=뉴시스)
윤민영 기자 min0@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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