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쓰는 오늘이 3·1절이라서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소액을 정기후원하는 독립운동 기념사업 분야 시민단체가 캠페인 부스를 차려서였다. 8~9년째 3·1절이면 대개 해온 일이다. 올해 현장 분위기가 달랐다. 엄마 아빠와 아이들은 많이 나왔는데 부스를 차린 시민단체 숫자가 예년의 3분의 1로 줄었다.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야 했다. 단체 상근자들 사이에 “정부가 시민단체 행사 지원금을 많이 줄여서…”라는 말이 돌았다. 정부가 독립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마땅한데 줄이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국방부 소속기관인 국방홍보원에서 임기제 공무원으로 올해 1월 하순까지 3년 동안 일했다. 회의에 참석하러 용산 국방부 청사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 좋았던 일 가운데 하나다. 국방부 청사 출입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강우규 박승환 안중근, 오른쪽에 홍범도 윤봉길 이봉창 순서로 세워 놓은 여섯 분 독립운동가 흉상을 잠시 서서 바라보곤 했다.
박승환 참령은 대한제국 군대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으로 1907년 8월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의분을 느끼며 권총으로 자결했다. 우리 장병들은 이 행동을 보고 떨쳐 일어나 일본 군대와 전투에 들어갔으나 남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대기하던 상대방한테 화력과 병력에서 밀리고 말았다. 흩어진 장병 상당수는 의병으로 전환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벌인 항쟁은 ‘남대문 전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이 크게 보도할 정도로 세계 이목을 끌었다.
독립군 홍범도 장군은 1920년 막강한 일본 정규군 부대를 상대로 한 봉오동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일궈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는 독립군과 광복군 부대를 조직하기 힘들었던 1930년대에 개별 특공 작전인 폭탄 투척 투쟁을 벌였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자랑스러운 독립전쟁 역사를 계승한다는 물증으로 본부 청사 앞에 여섯 분 흉상을 세워 놓았으니, 누가 봐도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12월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이란 책을 보면, 발간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과 광복군의 정통성 위에 건설된 대한민국과 국군은 항일 독립투쟁의 총결”이라며 “국군은 대한제국군-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진 국군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가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이 연합군 일원으로 중국 영국 미국 군대와 당당히 연합작전을 편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일본 패망 직후인 1945년 8월18일 일본군을 우리 손으로 무장해제하려고 광복군 대원들이 미군 수송기 편으로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던 국내 진공작전을 소개하고 있다.
국군의 뿌리와 관련해선 복잡한 내막도 있다. 독립전쟁 역사보다는 1945년 이후 미 군정이 세운 국방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를 국군의 뿌리처럼 이야기하던 시절이 매우 길었다. 그 시절에 독립군, 광복군보다는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득세하고 큰소리치고 행세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과 같은 책을 정부 차원에서 펴낸 게 아주 최근인 겨우 5년 전이다.
3·1절을 지내면서 독립전쟁 역사를 공부하고 널리 알릴 필요성을 느낀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자랑스러운 독립전쟁 역사를 계승하는 데는 변함이 없으리라고 기대한다.
박창식 전 국방홍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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